우리동네 도로명 유래도 알고 상가도 알고 - ③ 원흥로
두꺼비마을신문에서는 생태교육연구소‘터’, 충북드론교육원과 공동으로 우리동네 도로명 유래도 알고 상가도 소개하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마을의 역사도 알고 상가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본지 기획 특집 기사에 많은 관심과 성원 보내주세요.

 청주시 서원구 산남동에 있는 ‘원흥로’ 도로명 표지
청주시 서원구 산남동에 있는 ‘원흥로’ 도로명 표지

“구룡산의 남쪽”을 의미하는 ‘산남(山南)’이라는 지명은 공식적으로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생겼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이 동네를 뭐라고 불렀을까? 그걸 알려주는 도로명이 있으니 바로 ‘원흥로’다.

 

        ‘원흥로’의 기점(산미로삼거리)과 종점(두꺼비공원삼거리)
        ‘원흥로’의 기점(산미로삼거리)과 종점(두꺼비공원삼거리)

‘원흥로’ 도로명의 부여 사유는 “옛 지명인 원현리 마을 지명 및 인근에 위치한 원흥이방죽 명칭 반영”이라고 한다. 그리고 ‘원흥로’의 도로 구간은 산남동 남쪽에 있는 ‘산미로삼거리’(기점)에서 북쪽에 있는 ‘두꺼비공원삼거리’(종점)에 이르는 1,053m이다. <사진2>에서 알 수 있듯이 산남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원흥로’에서 ‘원흥’은 무엇이기에 도로명으로까지 정해진 것일까?

1919년에 제작된 『조선지지자료』를 보면 충청북도 청주군 사주면 산남리에 속한 마을로 ‘원흥리(이)’가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사진3>은 1990년 지형도인데 산남동에 ‘원흥이방죽’과 ‘원흥이’라는 마을이 표기되어 있다. 즉 ‘산남(山南)’이라는 지명이 1910년대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원흥이’라는 지명도 함께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산남동 지도에 있는 ‘원흥이’와 ‘원흥이방죽’ 표기
산남동 지도에 있는 ‘원흥이’와 ‘원흥이방죽’ 표기

산남동에 있던 마을 ‘원흥이’와 ‘원흥이방죽’. 그렇다면 ‘원흥이’와 ‘원흥’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원흥이’는 ‘원흥+이’로 ‘원흥’이라는 명사에 이어 ‘이’라는 안정성 명사화소를 접미사로 붙여서 발음과 청음을 유려(글이나 말, 곡선 따위가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답다.)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불안정한 발음을 심리적으로 보완하기 위하여 안정성 명사화소를 붙이는 발음심리학의 원리라고 한다.

‘원흥이’의 어원인 ‘원흥’이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를 정리해보면 ‘산남동’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산남(山南)’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에는 ‘원흥이’ 혹은 ‘원흥’이라는 지명이 더 먼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구한말(1890년대 말~1900년대 초)에 제작된 지도(사진4)를 보면 구룡산 자락에 ‘원흥(原興)’이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原興’(원흥)이라고 표기된 구한말 지도(사진4)보다 앞선 시기에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 청주목’ 지도(사진5)를 보면 남주내면에 ‘원’자의 한자가 다르지만 ‘원흥(元興)’이라는 표기가 확인된다.

구룡산 자락에 ‘원흥(原興)’이 표기된 구한말 지형도

‘原興’(원흥)이 표기된 구한말 지도(사진4)와 ‘元興’(원흥)이 표기된 1872년 지도 이전에도 ‘원흥’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을까?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원흥이방죽’이다.

 1872년 지방지도 청주목 지도 남주내면에 표기된 ‘원흥(元興)’
1872년 지방지도 청주목 지도 남주내면에 표기된 ‘원흥(元興)’

산남3지구가 개발되기 전에 만난 주민들에 의하면 ‘원흥이방죽’은 새마을운동 시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방죽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175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를 비롯해서 1800년대~ 1900년대 초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의 ‘제언(堤堰)’ 즉 ‘방죽’에 대한 기록을 보면 ‘원흥제(元興堤)’ 혹은 ‘원흥제언(元興堤堰)’이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다.

지리지에 나오는 방죽과 관련된 내용들은 공통적으로 읍치로부터의 거리와 방죽의 둘레 그리고 방죽의 수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원흥제’ 혹은 ‘원흥제언’으로 표기된 방죽은 현재의 ‘원흥이방죽’과 동일한 방죽일 수도 있고, ‘원흥이방죽’을 새롭게 만들기 전에 있었던 방죽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원흥’이라는 방죽의 명칭이다. 즉 ‘원흥제’(元興堤)와 ‘원흥제언’(元興堤堰)을 통해 이미 1700년대에도 ‘원흥’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각종 지리지(왼쪽부터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청주군읍지)에 ‘원흥제’와 ‘원흥제언’
각종 지리지(왼쪽부터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청주군읍지)에 ‘원흥제’와 ‘원흥제언’

<사진6>에 보이는 지리지들이 제작된 시기 보다 연도를 300년 앞당겨 1400년대로 올라가 보자. 『조선왕조실록』중 태종실록 14권 1407년 12월 2일 기사에 ‘원흥(原興)’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과 불설금강반야밀경에 나오는 ‘원흥사’
조선왕조실록과 불설금강반야밀경에 나오는 ‘원흥사’

<사진7>의 왼쪽은「태종실록」인데 기사의 내용은 ‘의정부(議政府)에서 명찰(名刹)로써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자복사(資福寺)는 각 지역에서 왕실의 명복을 빌거나 국가나 지방의 행사를 주관하도록 지정된 사찰을 말하는데 전국의 많은 사찰들을 언급하면서 ‘청주 원흥사(淸州 原興寺)’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한말 지도에 표기되었던 ‘원흥(原興)’이 1407년 「태종실록」에도 있으니 ‘원흥’이라는 지명(명칭)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흥’이 표기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불설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간기이다. 『직지』가 간기(刊記 *동양의 간행본에서 출판한 때/곳/간행자 따위를 적은 부분)를 통해 청주목 흥덕사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했음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가치가 높은데 『불설금강반야바라밀경』도 간기(사진7 오른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목판으로 인쇄된 이 책은 보물 제1408호로 지정되었는데 간기에 ‘대덕9년(1305년) 청주목 원흥사(元興社)*’라는 기록을 통해 ‘원흥’이 1300년대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원흥’이라는 지명(명칭)은 <사진8>에서 알 수 있듯이 산남동 일대에서 ‘원흥로’를 비롯해 원흥빌딩, 원흥반점, 원흥빌, 원흥이공인중개사 등 다양한 건물과 상가에서 사용되었거나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이상으로 도로명 ‘원흥로’의 ‘원흥’이 7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옛 자료들에서 ‘원흥’은 ‘原興’(원흥)과 ‘元興’(원흥)으로 ‘원’자의 한자가 서로 다르지만 ‘원흥’이라는 이름은 오랜 기간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원흥로’라는 도로명을 통해 산남동에서 ‘원흥’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잘 기억했으면 좋겠다.

※ 1면 원흥로 드론 사진 촬영_이홍일(원흥닭발통닭/충북드론교육원)

신제인 소장(생태교육연구소 ‘터’)
신제인 소장(생태교육연구소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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