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도로명 유래도 알고 상가도 알고 - ①탑골로

〈사진1〉 청주시 서원구 '탑골로' 도로명 표지
〈사진1〉 청주시 서원구 '탑골로' 도로명 표지

수곡중학교 쪽에서 산남동으로 들어서면서 왼쪽에 있는 농협 옆으로 난 도로, 즉 현진에버빌APT와 대원 칸타빌APT 방향으로 길게 뻗은 도로의 도로명은 ‘탑골로’다.

현재 청주시 상당구에는 ‘탑동로’가 있고, 서원구에는 ‘탑골로’가 있다. 모두 ‘탑’(塔)과 연관이 있는데 그렇다면 산남동 ‘탑골로’는 어떤 ‘탑’과 연관이 있고, ‘탑골’ 즉 “탑이 있는 고을”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탑골로’에 대한 도로명 부여 사유를 찾아보면 “옛 지명인 탑골마을의 지명 및 역사성 반영”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탑골로’는 〈사진2〉에 나오듯이 산남동 현진에버빌APT와 대원칸타빌APT 앞 도로를 말한다.

〈사진2〉 '탑골로'의 기점(산남동 1107번지)과 종점(산남동 1241번지)
〈사진2〉 '탑골로'의 기점(산남동 1107번지)과 종점(산남동 1241번지)

 

현재 산남동 일대는 택지개발을 통해 새롭게 조성된 마을이다. 원래는 논과 밭들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는데 아파트와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산남동 일대의 옛 모습과 지명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은 예전에 제작된 지도들을 통해 유추 할 수 있다. ‘탑골로’라는 도로명의 근간이 된 ‘탑골’의 모습 역시 옛 지도를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는 있다.

 

〈사진3〉 1984년 현지 조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1:5,000 지형도에 표기된 '탐골'
〈사진3〉 1984년 현지 조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1:5,000 지형도에 표기된 '탐골'

1984년에 제작된 1:5,000의 의 지형도를 보면 논과 밭들로 이루어진 마을의 모습이 보이는데 왼쪽 아래쪽에 ‘탑골’이라는 큰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탑골’ 마을은 점점 범위가 확대되어 ‘탑골’ 을 중심으로 ‘윗탑골’과 ‘아래탑골’이라는 작은 마을들로 구분되어 불리어졌음을 〈사진3〉의 지도를 통해 또한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서는 부분에 ‘탑골교’라는 다리도 표기되어 있다. 다리 아래로는 사라진 ‘산남방죽’과 현재도 남아 있는 ‘원흥이방죽’으로부터 물이 흘러 내려 왔었다.

‘탑골’, ‘윗탑골’, ‘아래탑골’이라는 마을들과 ‘탑골교’라는 다리는 비록 택지개발로 사라졌지만 그 이름만은 현재도 ‘탑골로’라는 도로명과 도로명 주소로 계승되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본 지형도는 1984년에 현지 조사를 통해 만들어지고 편집과 수정(1988년)을 거쳐 1991년에 인쇄된 것인데 그 이전에도 ‘탑골’이었을까?

 

〈사진4〉 '탑골'이 아니라 '탑동(塔洞)'로 표기되어 있는 1914년 지형도
〈사진4〉 '탑골'이 아니라 '탑동(塔洞)'로 표기되어 있는 1914년 지형도

〈사진4〉의 지도를 보면 구룡산을 기준으로 산남리 (山南里)와 산북리(山北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에 제작된 지도로 그 이후에 산남리는 계속 살아남아 현재의 산남동이 된 것이고, 산북리는 주변의 지역으로 합쳐지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산남리에 속한 마을로 ‘탑동’(塔洞)이 보인다.

이처럼 1991년에 인쇄된 지도에는 ‘탑골’, 1914년에 제작된 지도에는 ‘탑동’(塔洞)으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탑골’이라는 지명 이전에 ‘탑동’(塔洞)이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일까? 아니면 ‘탑동’(塔洞)이라는 한자 지명을 한글로 표기하면서 ‘탑 골’이라고 한 것일까? 사실 ‘탑동’(塔洞)이나 ‘탑골’은 같은 의미이므로 전후 관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탑골’과 ‘탑동’(塔洞)으로 표기된 지도들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지도에서는 ‘탑촌’(塔村)이 확인된다. 구한말 즉 1890년대 말 ~ 1900년대 초에 제작된 〈사진5〉지도를 보면 ‘原興’(원흥)과 ‘粉洞’(분 동) 아래에 ‘塔村’(탑촌)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원흥’이 현재 산남동이고, ‘분동’은 현재 청주온천이 있는 분평동 일대이므로 ‘탑촌’은 ‘탑골’ 혹은 ‘탑동’과 동일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사진5〉 1890년말 ~ 1900년대 초에 제작된 지도에는  ‘塔村’(탑촌)
〈사진5〉 1890년말 ~ 1900년대 초에 제작된 지도에는  ‘塔村’(탑촌)

 

그렇다면 현재 산남동 ‘탑골로’의 근거가 된 ‘탑’(塔) 은 어디에 있을까? 아쉽게도 현재 ‘탑골로’에는 ‘탑’(塔)이 없다. 게다가 예전에 ‘탑골’이었던 지역에도 ‘탑’(塔) 없이 지명으로만 ‘탑골’ 혹은 ‘탑동’이라고 부른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산남동 일대는 택지개발을 하기 전에 문화재 조사를 실시했는데 ‘탑골’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절터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기와조각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 되었다. 특히 광산김씨 문중인 김원택묘역에서는 귀중한 복식들이 출토되어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김원택묘 앞에 ‘탑’(塔)의 일부로 보이는 석물( 〈사진6〉좌측 화살표)이 있었다.

〈사진6〉 김원택 묘역과 그 앞에 있는 석탑(죄측 화살표)의 일부
〈사진6〉 김원택 묘역과 그 앞에 있는 석탑(죄측 화살표)의 일부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이를 ‘서고’(書庫)라 불렀다고 한다. 그 내부에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서고’(書庫)라 했는데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석탑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석탑의 한 층에 해당하는 것인데 어디서 옮겨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마도 ‘탑골’에서 옮겨왔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문화재조사를 마치고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김원택묘는 충남 보령으로 이장했는데 그렇다면 그 앞에 있던 탑은 어디에 있을까? 당시 조사보고서를 보면 “서고(書庫)라 불리는 탑은 본래 묘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묘 이장시 별도로 일정한 장소로 이전 복원하여 보존되도록 하겠다”고 나와서인지 현재는 충북대학교 박물관 앞에 있는 잔디밭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다.

〈사진7〉 충북대학교 박물관 앞 잔디밭으로 옮겨진 산남동에 있던 탑(塔)(화살표)
〈사진7〉 충북대학교 박물관 앞 잔디밭으로 옮겨진 산남동에 있던 탑(塔)(화살표)

 

충북대학교 박물관 앞 잔디밭에 있는 탑을 보면서 “탑신석의 네 귀퉁이에 기둥이 표현돼 있고, 옥개석 밑에 층급받침은 마치 건물의 서까래를 표현한 듯 한 데 이것은 신라때는 5단, 대개 고려초는 4단, 조선시대로 오면 3단으로 줄어드는 것이 특징이고, 낙수면의 물매가 아주 안정되고 멋이 있게 표현해 놓아 통일 신라 말기 쯤의 전형적인 석탑약식을 가지고 있다.” 는 설명보다는 “이 탑이 원래 자리로 추정되는 산남동 ‘탑골로’에 있다면 도로명과 딱  어울리고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신제인 소장(생태교육연구소 '터'
신제인 소장(생태교육연구소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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