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인문학을 읽다

오동균 신부                              ​​​​​​​​​​​​​​​​​​​​​(대한성공회 청주산남교회)
오동균 신부(대한성공회 청주산남교회)

우리 산남동 마을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생태마을과 마을공동체가 건설되어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몇 안되는 귀한 사례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한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자발적이고 자치적인 활동을 오랫동안 이어오는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을의 사례는 개발 위주의 도시화 현상 한 가운데 매우 보기 드물게 형성된 귀한 사례입니다. 농업경제에 기반을 두고 사회발전이 분화되지 않고 수많은 신분과 관습의 족쇄에 매여 살아야 하는 전통적 마을공동체는 부정적인 모습을 강요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산남동 마을 공동체는 자유가 보장된 첨단 도시 한가운데서 새롭게 건설할 공동체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산남동 마을공동체는 산남3지구라는 신도시개발 계획으로 시작된 ‘신도시 아파트단지’인데 거기에는 역사적 탄생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탄생과정에서 개발사측과 청주시민들이 신도시 아파트단지를 건설 할 때 그곳을 생태적인 도시마을로 만들자는 요구를 놓고 오랜 기간 투쟁하고 마침내 상생 합의가 만들어졌던 사실말입니다. 이러한 역사성은 초창기 원흥이 두꺼비서식지 보호를 위해 투쟁했던 청주시민의 운동을 이어갈 ‘두꺼비친구들’이 마을의 형성과정에 깊게 참여하면서 현실화시켜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탄생과정의 역사성과 그 후 그것을 마을공동체 형성 과정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참여 주체의 결합체는 아파트단지의 생태적 설계와 그 이후 상가와 아파트단지, 그리고 법원과 검찰청, 교육청 등 관공서가 함께 이룩하는 마을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던 것입니다. 

산남동은 이른바 ‘법조타운’으로서 매우 소비성향이 높고 교육과 문화에 있어서 평균보다 높은 수준의 주민들로 구성된 마을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조건이 꼭 좋은 마을을 형성 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산남동은 일반적인 좋은 조건과 다른 조건을 자신들의 강점으로 추구해 나갔습 니다. 그것은 바로 ‘두꺼비’로 상징되는 생태적 마을입니다. 두꺼비친구들은 마을에 아파트입주민과 상가 상인들이 입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들과 함께 자발적 생태마을 정신을 고취시켰습니다. 그 결과 아파트주민협의회, 두꺼비마을신문, 작은도서관협의회, 산남오너즈, 산남행복교육공동체 등 마을공동체의 주체들이 형성하는 ‘정신적 지향’을 모아서 구체적 실천단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지금 산남동 마을공동체의 주체요 힘입니다. 

지금 산남동은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코로나를 겪고 난 후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형성할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태적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토피아>의 작가 토마스 모어는 16세기 영국 지식인으로서 그가 바라본 중세말 근대초의 사회변화에서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을 <유토피아>라는 작품에 담아서 디자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참상을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양모산업이 부흥하던 영국의 상황에서 부는 증가할 지 몰라도 일반 시민들 노동자들의 삶은 비인간적 노동현장에서 죽어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기후위기의 사회입니다. 그것은 미래의 세대가 살아갈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조상으로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저는 토마스 모어의 표현에 빗대어 “후손을 잡아먹는 사회”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생태적 멸절의 위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플라스틱 없는 동네’, ‘자동차 없는 동네’, ‘숲과 습지 한가운데 있는 마을’을 꿈꾸는 것 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으면 시골로 가라고 야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꾸는 꿈은 우리 동네만 그렇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전체 도시로 번져나갈 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시가 숲과 습지에 둘러싸이고 조그마한 숲속 타운들로 나뉜다면 도시는 지방으로 흩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구 몇 백만씩 되는 대도시와 지방 소멸의 양극화 대신 소규모 생태도시로 전국이 가득 차서 결국 지방과 서울이 큰 차이 없이 사는 한반도의 사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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