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올림픽이야기가 있어서 모두 더위를 잊고 지낸 것 같다. 1896년 근대올림픽이 시작된 이래 숱한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온 올림픽이었지만 올해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라는 전세계적 역병 속에서 감행된 행사였기 때문에 유난히 말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번 올림픽은 새로운 세대들의 즐기는 올림픽을 보여주어 또 다른 의미를 새긴 것 같다. 전처럼 메달이 국민과 국가의 염원이 아닌 개인의 성취이며 꼭 메달이 아니라도 즐겁게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고 정치 경제적인 면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있었지만 유독 스포츠에서 애국프레임이 걷히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언론도 바뀐 모습을 조금은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선수의 개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즐기는 올림픽 감상이 많았다.

그런데 양궁 안산 선수에 대한 혐오에서 보여주는 혐오문화가 드러났다. 나는 혐오발언이 나오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잘 몰라서 나중에 보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전부이지만 안산 선수 뿐 아니라 선수 개인에 대한 평가를 하는 말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은 나에게는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미 우리나라는 인터넷 이라는 공간에서 ‘평판의 광장’이 형성되어 있고 이 평판의 광장에서 도마에 오르는 것은 다양한 대중적 의견을 형성하는 공론의 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대중의 공론장에는 이렇게 가벼운 평판들, 즉 뒷담화를 통한 의견피력이 기본 동력이 되어 표현의 자유가 발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안산 선수에 대한 혐오는 평판을 넘어 공격으로 돌변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매우 걱정스러운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을 비평하지 않을 수 없다. 안산선수에게 가해진 혐오는 그가 ‘페미’라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숏커트 헤어스타일을 했기 때문에 그가 ‘페미’(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것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나쁜 여자를 의미하는 부정적 언어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을 규제하고 그것을 통해 여성들의 지위를 규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차별적 관행이다. 그런데 21세기에 숏커트 때문에 여성을 혐오하다니! 이러한 현상이 젊은 세대들에게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여성들이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시행하겠다고 하여 세계의 공분을 사고 있는데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각이 ‘안산 숏커트 페미’라는 혐오현상이다. 페미니스트라는 언어가 억압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50 여년전 여성들이 동등한 선거권을 주장하자 남성들이 지배하던 사회는 국가차원에서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였고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혐오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운동은 이렇게 법률과 사회적 혐오 앞에 억압되었지만 몇몇 선구자들의 희생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여성참정권운동이 확산되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중에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여성이 국왕 조지 5세의 경주마가 결승골을 향해 질주할 때 그 앞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참정권 운동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후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현재까지 여성들에게도 참정권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사고가 생기기 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차별적 언행을 한 사람에 대한 법률적 처벌을 중하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언론에서조차 혐오와 차별을 일삼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의 문화의 격조를 높이는 것은 이제 존중과 연대를 개개인의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오동균 신부
오동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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