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세계사적으로도 현대의 금자탑을 쌓았다할만큼 비약적이고 독특한 발전을 이루었다. 19세기말까지 구체제라 할 수 있는 조선왕조는 변화하는 세계사에서 고립되고 뒤떨어진 채 나약해져 갔다. 결국 청나라가 서구열강에 멸망할 때까지도 자기고립과 자기분열의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일본의 군국주의적 확장에 무릎 꿇고 국권을 빼앗겼다. 이러한 구한말의 미몽에서 몇몇 지식인들이 공화제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눈을 뜨고 근대화의 씨앗을 키워나갔지만 일제의 강압적 합병으로 외세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화라는 절뚝발이 근대화의 과정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의 길을 찾아 자립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곧바로 분단과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운명은 가장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전후의 대한민국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난과 불행이 겹겹이 쌓여있는 상황에서도 1960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혁명이 성공했고 곧바로 군사독재가 이 공을 가로챘지만 결국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 항쟁을 통해 직접선거를 통한 정부의 선택, 그 후 이른바 ‘문민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의 과정은 끝나지 않았고 이러한 민주주의 운동과 경제발전을 함께 이룩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준 것이 대한민국의 최근세사이다.

2021년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기형적이고 모순적인 우리의 실상에 마주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토록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는데 왜 우리는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했으며 길러내지 못했는가? 아직도 청소년, 여성, 노인, 장애인, 외국인 등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계속되고 있고 생태환경에 대한 시민의식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개인들의 생활은 매우 세련되어가고 있지만 구조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마을과 자연에서 환경을 지키고 생태적인 개선을 하기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는 힘이 모아지지 않는다. 최근에 청주시의 자연경관지구 조례에 대한 완화를 위한 토지주와 부동산업자, 개발업자들이 보여준 집요함에 비해 대다수 시민들은 녹지권이라는 개념으로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몇몇 토지주들의 이익을 위한 개발허가가 가져올 난개발의 폐해에 대해 시민들의 비판과 요구를 정치화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바로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모순의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개개인들의 시민들을 깨워야 할때이다. 다름이 아니라 생태시민의식, 민주시민의식의 고양이 필요하다.

생태민주시민의 의식화는 지난해 두꺼비친구들이 내건 ‘환경시민1%’ 운동이 목표로 삼고 있는 주제이다. 청주시민 85만명 가운데 1%의 시민을 환경시민으로 세우고 그들을 토론장으로 끌어내어야 한다. 그리고 생태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 그리고 생태민주주의적 삶과 환경에 대해 교육하고 시민들이 의견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개개인의 의견을 모으고 그 힘을 드러내야 건강하게 발전한다.

개인이 자신의 삶의 현실을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거기에 붙잡혀있던 생각에서 깨어나는 것을 의식화라고 한다. 한때 의식화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이 많았었다. 실제로 민주주의적 의식화의 과정에서 먼저 공부한 사람, 혹은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과정으로 훈육한다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인해 생겨난 폐단이었다. 그러나 파울로 프레이리의 이론에 의하면 의식화란 자기 삶에 대한 주체적 의식을 스스로 깨닫는 과정, 즉 가난한 자가 자신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깨달아 부의 불평등 구조에 눈을 뜨는 과정과 이에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의식화라고 하였다. 오늘날 생태민주주의의 의식화 이론에 적용해 본다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건강한 생태환경을 선택할 권리가 시민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 권리위에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실행할 수 있는 실천에 눈을 뜨는 것이다. 생태시민의 깨어있는 의식이 우리의 도시를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도시로 만들어 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오동균 신부
오동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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