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룸메이트에게 갖는 도덕적 의무

2008년 미국에서는 역사상 최대의 쇠고기 리콜 사태가 벌어졌다. 그 사태를 불러일으킨 영상에는 너무 체력이 약해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소를 발로 차고, 지게차로 밀고, 전기 충격을 가하고, 눈을 찌르는 도축장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쇠고기를 리콜한 이유는 그 소들의 안녕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단지 ‘걷지 못하는 쇠고기를 먹을 경우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는 ‘종차별주의’를 잘 설명하는 사건이다. ‘종차별주의’는 1971년 만들어진 단어로, 자신이 속한 종의 이익을 우선 옹호하는 태도이며,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는 ‘인간 아닌 존재들’에 대한 무관심을 지칭한다. 이에 반대하는 ‘종차별반대주의’는 편견 에서 유래한 인간과 동물 사이의 불평등은 차별이라고 보는 이념이다. 개인은 물론 모든 인간을 통틀어서도 어떤 동물종이 우월하고 열등한지를 재단할 권리를 갖고 있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는다’. 즉 현재 인간들은 다른 동물종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 비인간동물종 내에서도 또 계급을 나누고 구분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육식주의, 오랜기간 사람들이 학습한 신념
사회학자 멜라니 조이는 우리가 여러 종류의 고기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그 고기들과 그 동물들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간들이 그들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저 인간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차이가 생기고, 이는 그들의 고기를 소비하는 것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애초에 개와 돼지, 소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자의적, 사회적 구별은 동물을 대하는 행위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인간들은 동물들과 함께 살고 이름을 지어주며 애정을 주지만 동시에 그들이 생명이 없는 존재인 듯 이용하고 폭력적으로 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재미로 사자를 사냥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취미로 ‘월척’ 을 낚았다는 사람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윤리적인 도살’ 을 행하는 공장식 소형 축산업체들에는 갈채를 보내며 자신들의 소비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어린 송아지 고기에는 안타까움을 표하지만, 그들이 즐겨 먹는 ‘삼겹살’의 평균 도축 나이가 송아지보다 훨씬 어린 것에는 무감각하다. 즉 사람들은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사냥해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 다양한 조건을 기준으로 이분화하는 스키마(인지 도식. 개인의 의식· 무의식에 내재되어 각 상황을 판단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육식주의는 오랜 기간을 걸쳐 사람들이 학습한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능력
벤담은 어떤 존재가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핵심적인 특징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유무’를 말하고 있다. 고통이나 쾌락을 느낄 수있는 능력은 이익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 고통을 무시하거나 그 고통을 다른 존재의 동일한 고통과 같게 취급하지 않는 것은 잘못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이상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한다는 평등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즉 인간이 겪어서는 안 될 고통을 겪는 비인간동물종이 우리 종의 성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치 혹은 당연히 취급하는 것은 단순히 잘못된 일이라는 논리이다. 또한 미국의 철학자 톰 레건은 비슷한 경우는 비슷하게 다루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서 인간에게 보장하고 있는 평등권,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라’는 명제와 맞닿아있다. 톰 레건은 권리론에 입각해 동물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능력, 쾌감을 느끼는 능력에 있어 차이를 갖는다는 매우 타당한 근거가 마련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 행위를 동물에게만 허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옳다.


‘가장자리 상황 논증’이라는 논리
고작 동물을 다루는 일, 고기를 먹는 일이 ‘도덕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을 바꿔 말하면, 동물들이 도덕적 지위를 갖느냐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도덕적 지위가 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의미 있게 고려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으로, 또 다른 도덕적 지위의 주체인 인간이 그에 대해 도덕적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현재까지 인간들이 비인간동물종에게 행해왔던 수많은 행위들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동물들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가?
많은 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이에 대해 고민하였지만 아마 가장 일관적이고 강력한 논변은 ‘가장자리 상황 논증’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매우 간단한 논리이다.
동물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도덕 수동자이다. 그러나 도덕행위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박탈하게 된다면, 가장자리 인간들이 회색 지대에 놓이게 된다. 동물과 같이 도덕 수동자인 인간들, 유아, 식물인가, 지적 장애인 등을 인간 범주에서 가장자리에 있다고 하여 가장자리 인간들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그들을 도덕 수동자라고 하여 도덕적 고려에서 제외시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과 동물이 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일관성 논증에 의한다면, 설령 인간과 비인간동물종 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다르게 대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면 같게 대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모든 측면에서 유사한 존재들이 유사한 생명권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이 어떠한 기준을 선택하건 그 기준이 인간종의 경계와 정확하게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더 나아가 실질적 차이가 없거나 혹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유사할 경우 필연적으로 같게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인간의 식욕이 나머지 동물종들의 고통 위에 우선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글·사진_이희진
글·사진_이희진

※이희진씨가 직접 만든 비건요리들

이 글은 '지구에는 인간만 사는 게 아니다'라는 표제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되는 비거니즘에 관한 이야기의 하나이다. 지난 호 '오늘 고기를 드셨나요? (부제: 환경과 육식의 상관관계)'에 이은 것이다. 글쓴이 이희진씨는 두꺼비마을신문 제1기어린이기자 출신으로,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사회심리·법학 4학년에 재학중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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