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백편의자현’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글귀도 오래도록 읽고 또 읽으면 어느새 뜻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요. 근기가 낮은 사람일수록 어려운 문장을 만나면 화를 내며 돌아섭니다. ㅡ쳇, 이 따위 문장 내가 알 게 뭐람ㅡ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정말 좋은 것들은 현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은밀히 깊은 곳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조심스레 찾아가서 손을 내밀어야 만날 수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만난 것들과의 관계는 오래도록 변함없는 기쁨을 줍니다. 오늘 만날 시가 그렇습니다.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저는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집이란 게 대개 아주 얇고 대략 6~70 편의 시가 실려 있는 게 고작이지요. 어떤 시집은 다 읽는 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저를 사흘이나 붙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단 한 편의 시를 사흘 이나 읽었죠. 소리 내서 읽기도 하고 걸어 다니며 읽기도 하고 누워서 읽기도 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아름답고 멋졌죠. 탄복과 부러움이 뒤섞인 감흥 속에서 저는 사흘을 행복했습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시읽기였지요.

 

바람은 개를 기르지 않는다

신 용 목


개 혓바닥이 맑게 닦은 개밥그릇에 햇살이 반짝
제 눈을 달아놓는다 한 되들이 개밥그릇
 
마당을 지나간 바람은 백만 되 다시 백만 되
 
누가 바람의 등에 개 문신을 새겼을까-
너무 많은 눈빛을 어슬렁거리느라 흘려보냈다
 
개의 내장처럼 찌그러진 개밥그릇
 
어제는 종일을 잠만 잤고 오늘은 허공을 컹컹 짖는다
오랫동안 구름이 지나가는 바람의 내장처럼
 
잠잘 때마다 몸이 주리고 짖을 때마다 허공이 환하다
누가 바람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웠을까-
너무 많은 걸음을 땅을 파느라 심어버렸다
 
몸 한쪽을 울 끝에 묶어놓고
 
햇살을 잘게 빻는 빈 마당으로 서서 사립으로
열린 내장의 처음과 끝을 바라본다 컹컹
 
개밥그릇에 반짝이는 허기는 다시 백만 되
 
개는 바람에 짖지 않지만 바람은 개를 먹이지 않는다
개의 내장에는 바람 문신


ㅡ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비, 2007

 

<읽기>
 시인은 고요히 마당을 보고 있습니다. 마당엔 개 한 마리가 묶여 있고 한 되들이 개밥그릇이 놓여 있지요. 바람이 불고 햇살이 내리고 그게 풍경의 전부입니다. 사실별 게 없지요. 그러나 문제는 시인의 시각입니다. 시란 일종의 해석이지요.
 개 혓바닥이 맑게 닦아놓은 개밥그릇에 햇살이 비추는 것을 보고, 개밥그릇에 햇살이 제 눈을 달아놓는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개밥그릇은 태양과 한 몸이 되지 않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해진 이 한 마디.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마치 태양을 신으로 섬겼던 고대의 종교와 닮아 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햇살은 세상의 모든 물결 모든 나뭇잎 모든 반짝이는 사물에 제 눈을 달아놓을 것이고 그렇게 온 세상과 한 몸이 되겠지요.
 게다가 마당을 지나는 바람이 백만 되 다시 백만 되라니! 그 한 되들이 개밥그릇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바람을 그토록 하염없이 되고 있었겠습니까. 바람의 등엔 개의 문신이 새겨지고 개밥그릇은 개의 내장처럼 찌그러진 채 햇살과 구름과 바람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허기의 상징이며 동시에 생의 표징입니다. 시에 등장하는 각각의 물상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서로를 고리로 얽혀 한 풍경으로 드러나 있는 세계를 고요히 읽어내는 힘. 물론 이것은 무용한 상상입니다. 그러나 모든 유용이란 결국 무를 향해 가는 도정임을 이해한다면 이러한 무용을 우리가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것은 근원의 무용, 그 도저한 힘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신용목 시인은 그런 사유의 깊이를 고요하고 아무 것도 아닌 풍경 속에서 우리에게 꺼내 보여줍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힘이 결국 시의 힘일 것입니다. 그 힘에 놀라고 경배하는 오늘의 시 읽기입니다.

 


※정학명 시인은 산남동 부영아파트 정문 맞은 편에서 화원(가람식물원)을 운영하고 있는 꽃집 사장님이기도 합니다. 10여년 전 원흥이방죽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회를 열었던 시인이며, 마을신문을 초기부터 사랑해 주시는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화초 이야기를 청했더니 행복한 시 읽기로 화답해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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