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백편의자현’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글귀도 오래도록 읽고 또 읽으면 어느새 뜻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요. 근기가 낮은 사람일수록 어려운 문장을 만나면 화를 내며 돌아섭니다. ㅡ쳇, 이 따위 문장 내가 알 게 뭐람ㅡ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정말 좋은 것들은 현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은밀히 깊은 곳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조심스레 찾아가서 손을 내밀어야 만날 수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만난 것들과의 관계는 오래도록 변함없는 기쁨을 줍니다. 오늘 만날 시가 그렇습니다.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저는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집이란 게 대개 아주 얇고 대략 6~70 편의 시가 실려 있는 게 고작이지요. 어떤 시집은 다 읽는 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저를 사흘이나 붙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단 한 편의 시를 사흘 이나 읽었죠. 소리 내서 읽기도 하고 걸어 다니며 읽기도 하고 누워서 읽기도 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아름답고 멋졌죠. 탄복과 부러움이 뒤섞인 감흥 속에서 저는 사흘을 행복했습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시읽기였지요.
바람은 개를 기르지 않는다
신 용 목
개 혓바닥이 맑게 닦은 개밥그릇에 햇살이 반짝
ㅡ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비, 2007
<읽기>
시인은 고요히 마당을 보고 있습니다. 마당엔 개 한 마리가 묶여 있고 한 되들이 개밥그릇이 놓여 있지요. 바람이 불고 햇살이 내리고 그게 풍경의 전부입니다. 사실별 게 없지요. 그러나 문제는 시인의 시각입니다. 시란 일종의 해석이지요.
개 혓바닥이 맑게 닦아놓은 개밥그릇에 햇살이 비추는 것을 보고, 개밥그릇에 햇살이 제 눈을 달아놓는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개밥그릇은 태양과 한 몸이 되지 않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해진 이 한 마디.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마치 태양을 신으로 섬겼던 고대의 종교와 닮아 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햇살은 세상의 모든 물결 모든 나뭇잎 모든 반짝이는 사물에 제 눈을 달아놓을 것이고 그렇게 온 세상과 한 몸이 되겠지요.
게다가 마당을 지나는 바람이 백만 되 다시 백만 되라니! 그 한 되들이 개밥그릇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바람을 그토록 하염없이 되고 있었겠습니까. 바람의 등엔 개의 문신이 새겨지고 개밥그릇은 개의 내장처럼 찌그러진 채 햇살과 구름과 바람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허기의 상징이며 동시에 생의 표징입니다. 시에 등장하는 각각의 물상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서로를 고리로 얽혀 한 풍경으로 드러나 있는 세계를 고요히 읽어내는 힘. 물론 이것은 무용한 상상입니다. 그러나 모든 유용이란 결국 무를 향해 가는 도정임을 이해한다면 이러한 무용을 우리가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것은 근원의 무용, 그 도저한 힘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신용목 시인은 그런 사유의 깊이를 고요하고 아무 것도 아닌 풍경 속에서 우리에게 꺼내 보여줍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힘이 결국 시의 힘일 것입니다. 그 힘에 놀라고 경배하는 오늘의 시 읽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