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장군 승리의 청산리전투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이다.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 김좌진, 이장녕, 김규식, 최해, 정훈,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사관연성소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청산리대첩은 북로 군정서는 인원이 1600여 명, 소총 1300여 정, 군총 150 정, 기관총 7문으로 무장을 갖추었다.일본군은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분쇄하고자 2개 사단 25000여 병력을 출병시켰다. 이 정보를 입수한 북로 군정서는 2800여 명의 독립군을 이 전투에 참가시켰다. 청산리는 장백산, 백두산, 천보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계곡으로 천연의 요새지여서 김좌진 장군은 이 지역을 이용하여 전투를 전개하였다.

청산리 곳곳에서 3일 동안 계속된 이 전투에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들도 눈물겨운 지원활동에 나서 주었다. 이들은 총탄이 비가 오듯 쏟아지는 전쟁에서 주먹밥을 나르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해 주었으며 직접 전투에 가담하기도 하였다.청산리 대첩에 참가했던 이범석 장군에 의하면 독립군은 90여 명이 전사했으나 일본군은 무려 3300여 명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산리 싸움은 독립군의 항일 투쟁 중에서 가장 찬란한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김좌진장군이 이끈 청산리전투는 결코 우리 민족이 잊지 말아야하는 전투인 것 같다.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한번쯤 청산리 대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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