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도로명 유래도 알고 상가도 알고 ⑤

 

하늘에서 본 산미로 전경. / 드론촬영_이홍일님(원흥닭발통닭)

산남동  대원칸타빌2차APT와  부영APT를  지나  미평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도로명은 ‘산미로’다.

도로명이 ‘산미로’인 이유는 “산남동과 미평동을 연결하는 도로로써 동 명칭 조합”이다. 즉 ‘산남동’에서 ‘산’, ‘미평동’에서 ‘미’를 한 글자씩 따서 조합해서 만든 것이다.

‘산남동’에서 ‘산남’(山南)은 “구룡산의 남쪽”을 의미하고 ‘미평동’에서 ‘미평’(米坪)은 “쌀이 많이 나는 동네”여서 ‘쌀애들’ 또는 ‘미평’(米坪)이라고 한 것이다.

‘산미로’의 시작 지점인 기점은 <사진2>에 보이듯이 ‘가마삼거리’다. 그곳에서 시작된 ‘산미로’는 부영APT와 대원APT를 지나 1순환로와 만나는 지점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시작 지점인 ‘가마삼거리’가 있는 곳은 남이면 가마리로 2순환로이고, 종점은 1순환로가 되므로 ‘산남로’는 비록 작은 길이지만 청주의 큰 도로인 외곽 순환도로 중 2순환로와 1순환로를 연결하는 도로이다.

‘산미로’ 도로 구간

 

‘산미로’는 산남3지구 택지개발로 산남지구의 남쪽 끝에 새로 만들어진 도로이고, 도로명 역시 산남동과 미평동의 동 명칭을 조합해서 새롭게 생긴 것이어서 ‘산미로’ 혹은 ‘산미’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용례는 ‘산미로’외에 ‘산미로삼거리’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사진2> 오른쪽에 보이는 ‘산미로’ 양쪽의 APT들과 상가들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현재도 계속 새롭게 들어서고 있다.

‘산미로’를 지나면서 보이는 것 중 그나마 가장 오래 된 것은 요즘 이전 논란이 있는 ‘청주교도소’다. 그렇다면 ‘청주교도소’는 현재 자리에 언제부터 있었던 것이고, 예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청주교도소’는 ‘산미로’ 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산미로’를 지나다 보면 보이기도 하고, 산남동 부영APT의 높은 층에서도 보이는 곳이므로 그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산미로’ 개설 공사중인 모습

<사진3>을 보면 ‘산미로’ 도로를  개설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고 부영APT 공사는 마무리 단계로 보인다. 공사중인 도로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우리가 흔히 미평동에 있다고 ‘미평교도소’라고 부르는 곳인데 정식 명칭은 ‘청주교도소’이고 ‘청주여자교도소’(현재 전국 유일의 여자교도소, 1989년 설립)도 함께 있다. 이곳에 ‘청주교도소’가 들어선게 1978년이니 횟수로 46년이 되었다.

그렇다면 ‘청주교도소’가 1978년 현재 위치로 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사법기관을 통해 형이 확정된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하기 위한 곳인 ‘교도소’(矯導所)라는 명칭은 현재 사용하는 것이고 이전에는 ‘형무소’(刑務所)라고 하였고 그 전에는 ‘옥’(獄) 혹은 ‘감옥’(監獄)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청주의 옛 지도들을 통해 청주에 있던 ‘옥’(獄)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각종 지도에 표기된 청주 옥(獄)

<사진4>에 나오는 지도들은 오른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충청좌우도회아사세지도 청주’, ‘청주읍성도’, ‘1899년 청주군읍지’, ‘1872년 지방지도 청주목’ 지도인데 공통적으로 청주읍성 안에 ‘옥’(獄)이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위치로 ‘동장’(銅檣), ‘철탑’(鐵塔) 옆에 ‘옥’(獄)이 있다. 즉 성안길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 근처에 ‘옥’(獄)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청주읍성  안에  있던 ‘옥’(獄)은 1908년에 ‘공주감옥  청주분감’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이전하게 되는데 위치는 현재 탑동의 석탑아파트 자리(시내 구법원사거리에서  명암동  방향으로  가다가  원불교  뒤쪽에 위치)다. 이후 1919년에 ‘대전형무소  청주지소’로 개칭되고, 1943년에 ‘예방구금소’로 설치, 1946년에 ‘청주형무소’로 승격되게 된다.

<사진5>는 탑동에 있었던 ‘청주형무소’의 모습인데 사진 하단에 ‘청주형무소’라는 사진 제목 아래 “옥중에는 날마다 생활하는 수인(죄수)들이 1년 평균 4백명 정도”라는 추가적인 설명도 보인다. 이 ‘청주형무소’가 1961년에 오늘날과 같은 ‘청주교도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1978년에는 현재 위치로 옮기게 된 것이다. 

‘산미로’는 새롭게 만들어진 도로라서 특별히 역사적인 내용은 없지만 앞에서 살펴 본 ‘산미로’에서 보이는 ‘청주교도소’와 더불어 ‘산미로 122’에서 2007년에 발굴된 ‘청주 산남동 42-6번지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의 위치는 현재 ‘남도생갈비’(예전에는 ‘토방石갈비’)라는 식당과 뒤쪽 주차장 및 산자락 일대를 말한다.

탑동에 있던 청주형무소 모습

(재)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2006년~2007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그리고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는데 <사진6>은 ‘산남동 42-6번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의 모습으로 ‘부영아파트’와 ‘청주교도소’ 사이에  부분적으로  완공된 ‘산미로’가  보이고  아직 ‘흙에서’나 ‘남도생갈비’ 같은  식당들이  들어서기  전의  모습이다. 

산미로 122(산남동 42-6번지) 발굴 모습(중원문화재연구원 보고서)

 

이 유적에  대한  조사결과 12기의  원삼국시대  토광묘와 1기의 조선시대 토광묘 등이 확인되었다. ‘토광묘’(土壙墓)는 “지하에  수직으로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매장하거나  목관을  사용하는  형식으로  청동기 말기부터 철기시대에 유행한 무덤 형식”인데 무덤들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그 속에 ‘부장품’ 즉 ‘껴묻거리’가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미로 122’(산남동 42-6번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토광묘들에서 약 60개 정도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을 보면 3호묘(사진7 왼쪽)에서 출토된 구멍 뚫린 단지(사진7 오른쪽 위)가 있다. 이 토기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구멍에 죽관(竹管)이나 목관을 꽂아 주자(注子-술 따위를 담아 잔에 붓는 그릇)와 같은 용도로 사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아 의례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그리고 5호묘와 6호묘에서는 ‘재갈’(사진7 오른쪽 아래)도 출토되었다. ‘재갈’은 “말에 장착되는 마구류 중에서 말의 입에 물리는 도구로 끈을 연결하여 말을 제어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사진7>의 재갈은 예전에 청주박물관 ‘중원문화의 숨결’ 특별전에서 본 것인데 ‘청주 산남동’ 출토라고 적힌 작은 설명문을 보니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산미로 122(산남동 42-6번지)에서 출토된 단지와 재갈들
산미로 122(산남동 42-6번지)에서 출토된 단지와 재갈들
 산미로 122(산남동 42-6번지)에서 출토된 말모양 허리띠고리
산미로 122(산남동 42-6번지)에서 출토된 말모양 허리띠고리

 

‘마형대구’(馬形帶鉤)라는 ‘말 모양 허리띠 고리’도 출토되었다. ‘마형대구’는 청동으로 만든 허리띠 물림장식으로 안쪽에는 혁대를 연결시키는 돌출부가 나와 있고, 말의 앞가슴에서 길게 뻗어 나온 고리가 다른 방향의 혁대와 걸리도록 되어 있는데 청주박물관에 가면 그 실물을 언제든지 확인 할 수 있다. 이상의 유물들을 볼 때 ‘산남동 42-6번지’ 유적은 조성시기가 대체로 3세기~4세기로 여겨진다고 한다.

산남동과 미평동을 연결하는 도로인 ‘산미로’!!! 새로 생긴 도로이고 상가들도 최근에 들어섰지만 나름의 역사를 품고 있음을 기억하자.

 

 

신제인(생태교육연구소‘터) 소장
신제인(생태교육연구소‘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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