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우리 집에 반려동물이 들어왔다.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슬펐고 두 아들은 그런 엄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날들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은 남은 엄마를 잘 챙기라는 것이었다. 난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아들들의 소원 하나쯤 들어주고 싶었다. 큰아들은 게임기를, 둘째 아들은 강아지 키우기가 소원이라고 했다. 강아지는 아이 하나 키우는 것만큼 정성이 들어간다지만 이왕 마음먹었으니 들어주기로 했다.

강아지를 사겠다는 아들에게 “아들아, 너를 가격으로 매기면 얼마일 것 같니?” “아마 엄청난 가격이겠죠? 헤아릴 수 없을걸요~” 우린 생명에 가격을 매기는 건 생명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는 생각에 입양을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유기견 보호소로 향했다.

 

유기견보호소
청주 내수의 한적한 곳에 유기견보호소가 있다. 차에서 내리자 천지를 울릴 듯한 개 짖는 소리에 아들과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고 말았다. 큰 개들은 케이지 안에서 컹컹 짖었고 작은 개들은 울타리가 쳐진 마당에서 정신없이 짖거나 싸움을 벌였다. ‘이렇게 많은 개들이 버려지다니...’ 수많은 강아지 앞에서 우린 당황했다.

“강아지 입양하러 오셨나요?”
“네... ”

오기 전 홈페이지에서 미리 점찍어 두었던 강아지는 공고 기간이 끝나지 않아 3일 후 입양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린 다른 강아지를 데려가기로 하고 하얀 수컷 강아지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 강아지는 어떠세요?”

우리에게 데려온 강아지는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눈이 예쁜 몰티즈였다. 보호 기간을 이틀 남겨두고 안락사가 예정되어 있던 5살로 추정되는 강아지는 그렇게 우리 가족의 품으로 들어왔다.

‘버려진 데는 이유가 있겠죠?
감당하지 못할 거면 입양하지 마세요’

강아지를 안고 입양서류에 사인하기 전 유기견보호소 소장님이 한 말이다. 난 가족이 되었으니 평생 잘 보살필 거라고 했고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힘들다고 개나 버리는 한심한 인간이 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입양서류에 사인했다. 강아지 용품점에서 사료와 물건들을 사들고 강아지와 함께 집으로 왔다.

천하무적 오줌싸게
강아지는 버려진 상처 때문인지 조용한 아이였다. 아들들이 극성스럽게 만져도 가만히 견뎠다. 일주일쯤 지나자 내 몸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보호소에 있는 동안 기생충에 감염되었을지 몰라 약품 목욕을 시키고 장갑을 끼고 배설물을 치웠다. 가려워 잠을 못 자며 약과 연고로 버티기를 석 달.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할 때쯤 강아지는 배변판 대신 바닥에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테이블이나 의자 다리는 물론이고 물건이 떨어져 있으면 백발백중 다리를 들고 시원하게 오줌을 갈겼다. 심지어 아들 침대가 자신의 화장실인양 방문만 열려있으면 침대로 올라가 오줌을 쌌다. 강아지 훈련 영상을 뒤져봐도 배변 교정의 길은 요원했다. 그래서 말 길 못 알아듣는 강아지 대신 바닥에 물건을 흘리거나 방문을 열어두는 아들에게 주의를 줬다. 그렇게 우리는 동물과 공존하는 삶을 배워갔다.

심장이 아파요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강아지 입양 후 집안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한참 사춘기를 겪는 큰아들과의 대화가 편해졌고 남편도 퇴근하면 강아지부터 찾았다. 강아지는 명실공히 귀여운 막내 역할을 하며 사랑을 듬뿍 받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강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심장사상충 약을 먹으러 동물병원에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수의사 선생님께서 강아지 심장에서 잡음이 들린다고 얘기하셨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4년쯤 지나자 강아지는 매일 심장약을 먹기 시작했다.

강아지의 심장은 느리게 나빠져 갔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작년 3월 호흡곤란으로 입원을 했다. 병명은 폐수종. 살 확률이 반반이라고 했다. 입원 3일 후 몸무게가 1/3이나 빠진 뼈만 앙상한 강아지를 조심스레 안고 퇴원을 했지만, 강아지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저혈당으로 쇼크가 두 번이나 왔고 난 강아지가 먹을 때까지 음식을 만들어 들이밀었다. 드디어 돼지 감자 뼈로 만든 강아지용 감자탕을 힘겹게 먹었을 때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강아지가 떠났다
다시 살아난 강아지는 아무 힘이 없었다. 산책도 할수 없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잘 먹었지만, 근육이 빠져 등뼈가 앙상하게 솟아올랐다.  점점 죽음을 향해 가는 강아지를 지켜보면서 아버지를 떠나보낼 때도 너무 힘들었기에 강아지를 보낼때 너무 아파하지 말자고 매일 다짐 했다. 아픈 강아지를 옆에서 돌보았지만, 강아지는 열달 후 피를 토하며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처음 강아지를 입양할 때 어리석게도 난 이 아이의 죽음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강아지와 함께할 행복만 생각했다. 강아지가 우리 곁을 떠나자 사랑한 만큼, 그보다 더 아팠다.

열 달 동안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난 속수무책으로 슬픔에 잠식당했다. 강아지와 함께 한 6년이라는 시간의 흔적은 집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 침대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장염이 동시에 걸렸지만 사람 만나기가 싫어 병원도 가지 않고 화장실만 들락거렸다. 소위 펫로스 증후군이었다.

펫로스 증후군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리다 지치면 무기력하게 휴대폰을 열었다. 우연히 좋아했던 영화 ‘블랙스완’을 검색했고 영화 대신 아이돌 가수의 ‘블랙스완’ 영상을 보게 됐다. 침대에서 나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그들의 무대를 무기력하게 보았다. 그러다가 실내 자전거의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고 병원에 가서 위염약을 지었다. 아이돌의 음악을 들으며 허벅지가 터지도록 자전거를 탔고 로맨스 영화를 보고 울다가 입천장이 까지도록 바삭거리는 과자를 먹었다.

Life goes on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이제 다시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한다. 여전히 강아지가 그립다. 이제는 무지개다리 저편에서 우리 가족이 생을 열심히 달려 자기에게 건너올 때까지 예쁘게 앉아서 기다릴 강아지를 생각한다.

상처는 치유하여야 하고 삶은 흘러가야 한다. 아픔이 총알처럼 박히면 그걸 치유할 수 있는 건 타인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건 내 의지가 없이는 어렵다. 내 안의 감정들을 타인에게 완벽히 이해받고 위로받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내민 손은 분명 나를 일으킨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잃고 아픔을 겪는 이들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본다.


“도도야 너를 만나 행운이었어.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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