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 교사의 ‘국가보안법위반사건’ 재심 무죄 변론, 오원근 변호사 인터뷰

오원근변호사 사무실에서 ⓒ조현국
오원근변호사 사무실에서 ⓒ조현국

지난 9월 2일 청주지방법원 형사항소2부(부장판사 오창섭)는 1989년에 ‘한국전쟁 북침설 교육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산 강성호 교사(상당고)의 재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이 재심 사건의 쟁점과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지난 9일 강성호 교사의 재심 사건을 변호한 오원근 변호사(사진)를 만나보았다.

Q. 강성호 교사가 청구한 재심 사건은 무엇인가?

“강성호 선생님은 1989년 수업시간에 “6·25는 미군 북침으로 시작되었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유죄를 선고받고 교단을 떠나야 했다.

10년 만에 복직한 강성호 선생님은 자신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고, 2020년 1월 30일에 재심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는 2020년 7월부터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Q. 재심 변론할 때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나?

“강성호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1989년 당시의 판결 기록을 검토하면서 이 사건이 억울한 유죄 판결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억울한 사안이지만 감정적인 호소보다는 1989년 당시 사건에 제출된 증거들을 차분하게 재검토하면서 당시 유죄의 증거로 제시한 진술의 신빙성을 쟁점으로 삼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32년 전 유죄의 증거는 반 학생 60여명 중 5명 학생의 진술이었다. 그런데 한 학생은 강 선생이 북침설 이야기를 했다고 기억하는 이유로, 수업시간에 그 말을 듣고 옆자리에 있는 학생에게 말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날 옆자리 학생은 결석하였다. 다른 학생들도 법정 증언에서 처음에는 북침설을 들었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듣지 못했다고 하는 등 진술이 한결같지 못했다. 이들 진술은 그때나 지금이나 도무지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심 전 재판에서 나온 진술들과 재심 개시 후의 진술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그 진술들이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재판장에게 설득력 있고 호소력 있게 변론했다.”

오원근 변호사는 재심 법정 마지막 변론에서 “어떻게 이렇게 빈약한 증거들을 갖고, 검사가 기소하고 판사는 유죄를 선고하였는지, 변호인으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울컥했다고 한다. 법의 미명 하에 개별적인 인간에게 가해지는 국가의 폭력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인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하는 것’인데, 실상은 ‘상당한 기간 국가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이 남북 분단을 정권을 차지하거나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 왔고 강성호 교사도 그런 피해자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오 변호사가 “부디,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시어, 피고인이 이 사건으로 아직도 시달리고 있는 몸과 마음의 응어리를 조금이라고 풀 수 있도록 해주시고, 국가 권력이 한때는 피고인에 헤어날 수 없는 굴레를 씌웠지만, 늦게라도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그 억울함을 풀어주어 국가권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안도감을 갖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로 변론을 마친 이유도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성호 교사는 32년 만에 무죄를 판결 받았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목적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그를 고통에 빠뜨리고 깊은 상처를 남긴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엄연하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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