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매스컴에선 6.25사변이 70년전 일이라고 심심찮게 오르내리고 있다.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 같지만 필자는그 당시 고등학생이어서 옛기억을 더듬어 적어본다. 지금 우리주변은 모든것이 풍요롭고, 평화롭고, 행복하다.
그 시절은 전쟁중이었고 너나 없이 가난하고 힘든 시절일때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집은 영동군 황간면 소계리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2km는 걸어 나와야 황간역이 있었고 사십여리 떨어진곳에 영동농업고등학교가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하숙, 자취, 아니면 기차통학의 방법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기차통학이 제일 쉬웠다. 지금은 교통수단이 발달해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잠깐 가는데 그 시절은 연탄을 떼는 증기 기관차는 수시로 급수도 해야하고 전시 군수품을 실은 열차는 최우선, 일반 객차도 군용열차를 보내기 위해 수시로 대피(선로를 비우기 위해 임시로 빈선로에 대기)하는 형편이어서 열차시 간표는 형식적인 수단뿐이었고, 2~3시간을 연착해도 불만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학열차는 화물칸에 나무 의자를 달아놓았으니 한번타면 다른칸으로 이동이 불가능하고 창문도 없고 화장 실도 없었다. 토박이 농사꾼이야 그대로 살아갔지만 피난민들은 호구지책을 위해 너나 할것없이 보따리행상이요. 역주변을 맴도는 역장사, 과일행상으로 연명하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열차는 몇시간을 연착해도 불만하는 사람이 없었고 역주 변은 보따리 장사꾼들로 북적이는 생활의 터전이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통학생들은 행복했다. 새벽밥먹고 기차타고 영동에 도착하면 7시경.

 


학교수업이 시작하려면 2시간의 공백.
갈곳도 할일도 없다. 그래서 아침부터 도시락까먹기가 늘 하는 일이다.
점심때는 젓가락들고 이친구 저친구 돌아 가며 한젓갈씩 동냥인데 그때가 제일 배부른 날이다. 지금 같으면 어도 없는 일인데 그때는 제미로 서로 웃으며 받아 넘겼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또 갈곳이 없다.
보충수업도 없고 오후4시가 지나면 또고아가 된다. 통근열차야 7시면 오겠지만 또 얼마나 연착할지 모른다.
40여리길이니 걸어가도 4시간이면 가겠지만 역근처를 맴돌다 군용열차를 무임승차하기. 아니면 급커브 망가진 도로 에서 군용추럭 몰래타시다.
그래서 재수좋은 날이면 집에 일찍 갈수도 있었다. 하지만 잘못타면 김천, 대구까지 갈때도 있었으니 용감했었나 보다. 아주 재수 좋은날은 군용트럭이 일부러 정차 통학생들을 콩나무시루처럼 태우고 내려주는 고마운 아저씨도 있었다. 학생이라야 한동네 한두명 뿐이었으니 귀하신 몸이고 이웃 동네 처녀들 에게 인기도 있었나 보다.
또 어찌 생각하면 고생스럽고 짜증스럽지만 통학생 모두들은 아무도 불만도 없고 행복하게 산것 같다.

 

피원기 명예기자 산남부영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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