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동 513번지 이광구 통장 댁

예전에 산남동은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하지만 개발이 되면서 논, 밭은 사라지고 옛집은 다 헐렸다. 그 자리에 4차선 도로와 아파트, 학교, 상가가 들어서면서 마을풍경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겨우 원흥이 방죽만 남아 그 세월을 어렴풋이 짐작케 하는데, 마을은 변했어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산남동 토박이들. 산남동 통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이광구 씨(60세)는 한때 직장생활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때를 제외하곤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산남동에 살아온 산남동 역사의 산 증인이다. 전에 마을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는 ‘아딸’의 김수복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다. 누구보다도 산남동에 애정을 갖고 있는 그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의 교장 명패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자식에게 모범이 됐던 그리운 아버지

산남동 513번지. 퀸덤 아파트 맞은편 버스정류장 뒤 3층 건물이 그의 집이다. 원래는 지금 산남고 앞에 집이 있었는데 개발되면서 이리로 옮기게 되었단다. 고향친구들을 만나고 방금 돌아왔다는 그는 부인(박은순, 58세)과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전에 노비로 살던 사람이 자손 없이 죽으면서 세경 받은 돈으로 약간의 땅을 사서 동네사람들에게 맡기며 제사를 지내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그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어 얘기가 길어졌단다. 옛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하던 ‘노비’ 얘기를 들으니 신기하다.

화초도 많고 조화도 있고 집이 참 아늑하고 편안하다. 좌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집안을 둘러보니 제일 먼저 가족사진이랑 딸 결혼식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슬하에 딸 하나 아들 둘 삼남매를 두었는데, 딸은 결혼해 오창에 살고 있고 아들들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단다. 딸은 약사고, 아들들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에 취직했다니 절로 부러운 마음이 든다. 어떻게 하면 자식들이 다 그렇게 잘 될까?

“저희 집안이 다 교육자 출신이에요. 아버지도 남성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하셨고 여동생 넷도 지금 다 교직에 있어요. 저만 회사에 다녔죠.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이원교, 96년 작고)는 근면 성실한 분이었다. 학교에서 퇴근하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농사를 지으러 나가셨다. 연초조합을 다니며 하루 두 갑 반씩 피우던 담배도 암 투병 중이던 아버지에게서 “네 몸에서 쓴 내가 난다”라는 말을 듣고는 바로 끊어 버렸다. 그는 아직도 남겨진 아버지의 교장 명패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그래도 참 행복한 사람이다.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팔순이 넘은 노모가 아직 수영장을 다니고 컴퓨터를 배울 정도로 정정하시다니 말이다.


 통장으로, 학생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

아버지처럼 그도 부지런하다. 회사를 그만두고도 잠시도 가만있질 않는다. 농지원부를 발급받으려고 동사무소에 갔다 얼떨결에 통장이 되었다. 명관에서 S마트 까지 주택 약 370여 가구를 맡고 있는데 작년 말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걷으러 다니며 많은 걸 느꼈다고.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났어요. 쑥스러워서 아내랑 같이 다녔는데 5백원 주시는 분도 있고 주인 있을 때 다시 오라는 분도 있고. 장사가 잘 안되잖아요. 이해는 하지만 내가 참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죠. 그런가 하면 동화춘 사장님은 2만원을 주고도 더 못줘서 죄송하다고 하시고, 교육청 옆 호두나무정자 사장님은 나이 한 60 정도 됐나 1만원을 선뜻 내주시는데 엄청 고마웠어요. 인생 공부 많이 했죠. 돈 있는 사람이 더 내는 건 아니더라고요.”

통장으로, 학생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그는 심심할 틈이 없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충대 청강생이 되어 학교에도 다닌다. 명예학생이 되어 작년에는 동양사, 서양사를, 올해는 한국사를 듣고 있다. 이렇게 바깥으로 나도는 그에게 아내는 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집안일은 통 모른다고 살짝 불만을 내비친다. 그래도 이내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편을 든다. 부부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산남동의 옛 모습을 찾는 기자에게 그는 지나간 사진첩을 펼쳐 보여준다. 옛 집이랑 삼촌, 친구들, 뛰놀던 산천이 거기에 고스라니 박혀 있었다. 개발 당시 마구 깍여 나가던 산과 들을 바라볼 때면 마치 제 살을 베어내는 심정이었다고.

“그래도 다 살기 좋게 하자고 개발한 거잖아요. 상가가 활성화돼 산남동이 활기 넘치는 동네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의 바람대로 되자면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산남동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그가 앞으로 우리 산남동을 위해 어떤 일을 할지 기대 된다.

▶ 72년 22살때 집 뒷마당에서

▶친구와 함께 동네 뒷산에서(현재는 여기가 법원자리이고 뒷쪽은 생태공원이다)


글 김말숙, 사진 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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