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식(사람&사람) 변호사

  오늘도 어김없이 야근이다. 사무실 사정상 고용변호사를 줄이고 한 달 전부터 필자 혼자서 기존에 변호사 2명이 맡아서 하던 일을 혼자 도맡아서 처리하다보니 밥 먹듯이 야근이다. 가끔 뒷골이 핑 돌기도 한다. 이러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겁도 난다.
  10시에 들어와서 자고 있는 7살, 5살 두 딸을 물끄러미 보다보면 걱정이 앞선다. “얘들은 뭐 먹고 살려나!” 큰 애는 책을 좋아한다. 밥을 먹을 때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책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한다. 큰 애는 책을 좋아하니, ‘작가’를 시켜볼까? 전문직이고 남들 눈치 볼 것 없으니 말이다. 작은 애는 반대다. 책보다는 노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보다 애교도 더 떤다. ‘연예인’이나 시켜볼까? 그러자 돈 걱정이 앞선다. 예체능은 부모 등골이 휜다는데.
  로봇과 인공지능의 시대, 미래에는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일까? 기존의 ‘좋은 직업’이라고 하면 다들 비슷한 답을 떠올릴 것이다. 변호사ㆍ의사 같은 전문직, 대기업 직원, 공무원… 모두 안정성 또는 고소득이 보장되는 직업이다. 그런데 2017년 한국고용정보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재 사람이 수행하고 있는 능력의 상당 부분은 미래엔 쓸모없을 것으로 예측된다. 2030년 국내 398개 직업이 요구하는 역량 중 84.7%는 AI가 인간보다 낫거나 같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문영역으로 꼽혔던 의사(70%), 교수(59.3%), 변호사 (48.1%) 등의 역량도 대부분 AI로 대체될 전망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AI 변호사인 ‘로스’가 등장했다. 로스는 초당 1억 장의 법률 문서를 검토해 개별 사건에 가장 적절한 판례를 찾아내 추천한다. 2016년 미국 뉴욕의 유명 로펌들이 도입 했다고 한다.
  그런 객관적인 분석을 떠나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내 자식들에게 변호사를 권장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힘들게 사법시험 공부한 것도 있지만 어느 서비스업종과 마찬가지로 변호사 업계도 정신노동이며, 감정 소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의사와 비교해보자. 같은 전문직으로서 병리현상을 치유, 회복한다는 역할을 한다. 의사는 주로 ‘육체적’ 고통에 대한 솔루션을, 변호사는 ‘심리적’ 아픔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런데 의사는 선악구분이 분명하다. 의사는 ‘질병’과 싸운다. 따라서 의사는 언제나 ‘선’이고, 질병은 ‘악’이다. 그런데 변호사는 상대방(사람)과 싸운다. 피해자의 변호사로서 ‘선’한 역할을 맡기도 하지만, 때로는 살인자의 변호를 맡기도 한다.
  또 소송은 ‘스포츠’와 비교된다. 양쪽이 법정이라는 곳에서 법관이라는 주심하에 치열하게 주장과 증거를 제시하면서 판결이라는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은 흡사 축구와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을 이겼을 때, 모두 놀랐지만 그것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는다. 또 가끔은 4부리그 팀이 1부리그 팀을 이기기도 한다. ‘실력’과 ‘우연’, 그게 스포츠다. 그러나 소송은 다르다. 소송에서는 ‘진실’이 라는 전제가 있다. 따라서 소송의 승패는 진실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다. 따라서 소송에서는 어떤 것은 져야 하고, 어떤 것은 이겨야 한다. 즉 스포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고, 소송은 어둠속에서 등불을 들고 원래 존재하였던 ‘유’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변호사들의 수입도 예전과 같지 않다. 변호사의 양적 팽창으로 인해 평균적인 청년변호사들의 수입은 다른 직업과 별 차이가 없다. 또 각자 돌아올 파이가 줄어들다보니 서울이나 수도권 법원에 가서 보면 변호사들끼리 법정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것을 자주 본다. 변호사들은 말로서 싸우는데, 그 날선 것이 ‘칼’과 같다. 그래서 필자는 ‘서울 사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변호사만큼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이 보다 더 좋은 직업도 없다. ‘돈’만 포기하면 말이다. 그런데 필자도 그렇지만 딸들에게도 ‘돈’을 포기하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변호사를 ‘해 본’ 사람으로서 필자가 딸들에게 바라는 것은 ‘변호사’가 아니다. 그냥 ‘건강하게 자라서 괜찮은 놈 만나 결혼해서 잘 사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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