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현준(충북대 교수, 前두꺼비마을 아파트협의회장)

 

    산남동에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면서 입주한지 10년이 지났다고 그 소회를 마을 신문에 써달라는 청을 받고 잠시 망설였지만 한번 회고할 만한 일이다 싶어서 거절하지 못했다. 벌써 10년인가 싶어서 고1 막내아이가 처음 입주했을 때 샛별초 병설유치원에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계산을 해보니 맞다. 그러고 보니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특별한 변화를 실감하지는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복덕방 소개로 전세 아파트를 두 번 옮긴 뒤 지은 지 10년 된 아파트를 사서 10년 살다가 그 집을 팔고 처음으로 건설회사와 직거래로 분양을 받아 이사를 왔다. 그전에는 나와 관계없을 거라 생각했던 주택청약예금이나 건설사 모델하우스에서의 분양 추첨과 계약, 중도금 납부 같은 모든 과정을 직접 해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지금까지 유일한 경험이었다. 그러니 입주 전에도 건설현장을 두어 번 와볼 정도로 집에 관심과 애정이 더 있었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이 입주예정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생겼고 거기서 모인 의견이 건설 과정에 반영되기도 하였는데, 그 때는 참여정부 5년차에 접어든 시기였다.
   개인적인 일에만 머물던 나의 관심은 민주화, 지방자치, 지방분권시대의 연결선에서 마을운동이 필요하다는 각성과 함께 그것을 실행하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페미니스트운동이나 대안교육현장에서 다양한 실험을 벌여온 조한혜정(당시 연세대교수)의 말처럼 위험 사회의 대안으로서의 마을, 우정과 환대의 공간,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서로 돌보면서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만드는데 관심이 확장되고 있었다.
   산남동의 마을운동은 서울 마포구 성미산마을처럼 두꺼비마을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두꺼비라는 상징으로 개발압력에 대항하여 도심의 숲을 보존하려는 운동은 ‘산남3지구’ 조성계획을 바꾸면서 방죽이 있었던 자리를 남길 수 있었는데 그 후에도 두꺼비 이동로가 산으로 이어지도록 생태공원을 조성하면서 산을 깎아내는 전원주택지가 확장되지 못하게 하였다.
   부영아파트 바로 앞에 들어오려는 가스충전소를 막아내면서 마을의 8개아파트 대표들이 공동으로 펼친 마을운동은 여러 가지 실생활과 밀접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청주교육지원청의 정문과 담을 지금처럼 개방된 상태로 두고 공개공지처럼 주차장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주민들이 테니스 코트도 함께 쓰기 위해 아파트연합회에서 교육청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 땅은 산남지구의 평균조성원가 이하로 교육청이 구입하였으므로 그 비용을 직간접적으로 부담한 주민으로서나 납세자로서 당연한 권리이라는 논리를 주장했다. 그리하여 주민들의 테니스 동호회가 결성되었지만 마을운동과 연결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7년 전 마을운동이 샛별초 운동장 문제로 교육청과 대립하였을 때 그 테니스클럽 회원 중 일부가 노골적으로 교육청 편을 들어서 속상한 적이 있다.
   공청회도 없이 학교 운동장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내고 우레탄과 인조잔디를 설치한다고 하였을 때 시위, 천막농성, 현수막 등의 여론전 뿐 아니라 주민들이 직접 온 몸으로 굴삭기를 막아서는 실력행사와 함께 행정소송도 진행하였다. 결과적으로 샛별초의 나무와 운동장을 지켜내지는 못하였지만 당시 교육청의 관성에 제동을 거는 데는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10년 전의 중요한 논의 하나는 ‘마포FM’처럼 마을의 구심점이 되는 매체로서 가청범위 5 km정도의 마을공동체 FM라디오를 운영할지 신문을 발행할 지에 대한 것이다. 결국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그 때 만약 라디오 방송을 결정했다면 어땠을까? 언젠가 새로운 매체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면적만 보자면 청주시는 서울보다 크다. 경인지역을 포함하여 속칭 수도권이라고 부르는 면적은 고작 국토의 12% 밖에 안 된다. “균형발전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이 모두 함께 상생하는 길입니다”라고 말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 5년차에 입주했던 두꺼비마을, 국토의 중심 충북 청주시 산남동의 10년 전, 이곳에는 서로 돌보면서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마을, 서울의 어느 마을보다 더 멋진 곳으로 만들자는 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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