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식 변호사(사람 & 사람)

그저께 산남동 주민자치위원회 월례회를 마치고 위원장(강석종)님이 주민자치위원들을 댁으로 초대를 하여 위원장님 집에서 산해진미 안주와 술을 기분 좋게 마셨다. 그리고 좀 아쉬운 감이 남아 2차로 산남동 양고기집에서 양고기와 칭타오 맥주를 마시고 12시쯤 귀가했다. 누워서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고 그만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이런 저런 생각이 들다가 문득 우울해지더니 눈물까지 났다. 기분 좋게 술 마시고 와서 이 무슨 청승인지! 그 날 저녁에 알고 지내던 선배 변호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부음 문자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요즘 이유 없이 이런다.

   조금 전까지도 기분 좋게 술 마시며 웃고 떠들던 ‘나’와 집에 돌아와 드러누워 청승맞게 눈물짓는 ‘나’는 누구인가? 분명히 둘 다 ‘나’인데,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돌변할 수가 있을까? 진짜 ‘나’는 누구인가?

    변호사를 하다 보니 여기저기 일(직함)을 많이 맡고 있다. 한 달에 공식적인 모임(회의)만 10여회, 거기에 비공식까지 치면 하루건너 모임(술자리)이다. 우리 변호사회에서는 5년째 ‘이사’를 맡고 있고, 변호사축구팀 ‘회장’도 하고 있다. 동네에서는 ‘주민자치위원’을 한 지 6년차에 접어들었다. ‘마을신문’ 이사에 최근에는 아파트 ‘동대표’도 하게 됐다. 동네 상인들 모임인 ‘산남오너즈’에도 가입했다. 또 참여연대에서 올해부터 ‘사회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게됐다. ‘여성의 전화’에서 이사를 맡은 지도 5년이 된다. 그 외 서원구 인사위원회 등 5-6개의 공공기관 위원회 위원도 겸하고 있다. 무엇보다 제일 큰일은 아이들과 놀아주기다. 결혼을 늦게 하다 보니 이제 3살, 5살이다.

   이렇듯 나는 하루 대부분을 ‘변호사’로서 혹은 ‘아버지’로서의 ‘나’로 살아간다. 다 사회적으로 역할이 규정되어 있고, 그런 ‘나’를 다른 사람들은 ‘나’로 인식하고 평가한다. 그래서 나는 변호사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하고, 변호사니까 정의로워야 하며, 변호사니까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또 집에서는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충실하게 놀아주어야 한다. 특히 주말에는 무조건이다. ‘나’를 위한 시간은 거의 없다.

   그렇게 모임이 끝나고 귀가하여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밤이 되어 아이가 잠이 들면 그제서야 훈련소에서의 10분 휴식처럼 나에게도 달콤한 2시간이 주어진다. 그 2시간도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뉴스나 스마트폰 들여다보다가 누워서부터이다. 그러면 스멀스멀 ‘내’가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목구멍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머릿속에 들어앉고는 그 때부터 징징댄다. 자세히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다. 5살 딸래미나 다름없다. 울고불고 보채고, 뭐 해달라고 떼쓴다. 그러다 울어버린다. 아무리 달래도 뭐라뭐라 하기만 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다. 하도 답답하여 조용히 들어본다. 뭐라고? ‘나’좀 봐달란다. 그냥 얘기 좀 들어달란다. 그래서 얘기 좀 들어준다. 그러다 내일 해야 할 일이 생각난다. ‘내’ 말은 들리지가 않는다. 이내 잠이 든다.

   위로받기 참 힘든 세상이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나’한테도 말이다. 어느 덧 먹고사는 문제가 사람들의 귀와 입을 닫아버렸다. 출세하고, 돈도 벌어야 하며,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본연의 ‘나’는 귀찮은 존재다. 그래서 어두운 다락방에 처박아놓는다. 가끔 죽었나싶어서 안쓰러워서 들여다볼 뿐, 빼꼼 얼굴을 내밀고 얘기할라치면 문을 닫아버린다. 그냥 보여 지는, 남들이 규정하는 ‘나’로서 살아간다. 그게 편하다. 그러다가 ‘사랑은 사랑이 끝날 때 알게 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육신과 헤어지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그 본래의 ‘나’와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가혹한 질문을 받는다. 왜 ‘너’는 그 동안 ‘나’를 찾지 않았는가? 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가? 왜 남이 원하는 ‘너’로만 살았는가?

   그 수많은 ‘나’도 역시 ‘나’이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다. ‘나’란 존재는 150억년 전 빅뱅 언저리부터 부처와 예수의 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현세의 ‘나’는, 보여 지는 ‘나’는 육신과 함께 없어지고 만다. 물질만능,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가 찾아주고 얘기를 들어줘야 할 것은 본래의 ‘나’이다.

   오늘 아침엔 3월에 웬 눈이 내렸다. 바람도 제법 쌀쌀하다. 내 나이 40대 중반, ‘꽃샘추위’ 같다. 인생의 봄이 온 것 같지만, 그걸 시샘하는 추위가 남아 있는, 그래서 두꺼운 외투를 쉬 벗어버릴 수만은 없는 그런, 두 계절이 교차해있는 것처럼 내 마음은 어정쩡하다. 웃다가도 돌아서면 울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다. 그런 철없는 ‘나’를 찾아볼 생각이다.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