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코너에 박문규(58)씨 추천 소식을 듣고 진작 마을신문에 소개되어야 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여 년 전, 아파트 입주가 이뤄진 후 열린 두꺼비 축제 때부터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모습이 인상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생긴 아파트에 살지도 않는 분이 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지 궁금했던 차였다.

원흥이방죽을 보호한 ‘토박이’

“김원택 영의정 댁 바로 밑에서 4대째 살았어요.” 산남동과 언제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했냐는 질문에 박문규씨가 건넨 답변이었다. 박문규씨 설명에 따르면,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원흥이방죽 근처에 원흥이 마을에서 살았는데, 박문규씨도 거기에 살면서 결혼도 하고 5남매도 낳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곳이 개발됨에 따라 남일면 가중리로 이사를 갔다가 2008년에 다시 산남동으로 돌아왔다.

과거를 회상하던 박문규씨는 당시 개발 전후에 있었던 가슴 아픈 일화를 들려준다. 개발되기 전, 그러니까 현재 법원과 검찰청이 있고 8개 단지 아파트와 상가와 주택이 들어선 이른바 ‘산남 3지구’는 개발되기 전에는 ‘원흥이’ 마을(48가구: 산남초-퀸덤-한내들-원흥이방죽-청주시교육청 일대)과 ‘탑골’(58가구: 산남고-부영-푸르지오-칸타빌아파트 일대) 마을이 있었다. 그 평화롭던 마을은 1999년 3월 20일자로 개발지로 통보받게 되면서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는 모든 마을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지만 4대째 뿌리박고 살던 박문규씨 가족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래서 박문규씨는 아내와 함께 원흥이방죽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2005년 4월까지 투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닐하우스 투쟁’이 원흥이방죽 두꺼비 살리기 운동의 도화선이 될 줄이야. 박문규 씨 가족을 위시한 15가구 주민들이 있었기에 토지개발공사 측에서 개발 예정지인 원흥이방죽을 함부로 메꾸지 못했다는 것. 말하자면 원흥이 방죽 두꺼비살리기 운동의 토대를 토박이 박문규씨가 온몸으로 지켰던 셈이다. 그는 이 당시 원흥이방죽의 모습과 투쟁 상황을 녹화한 자료를 지금도 ‘가보’로 보존하고 있다고 귀뜸해 주었다.

 

 새마을지도자가 된 사연

박문규씨가 ‘새마을지도자’ 일을 시작한 것도 ‘원흥이 마을’이 있던 시절부터였다. 당시는 통마다 한 명씩 새마을지도자를 선정해야 했는데, 젊은 박문규씨가 당시 산미분장동 1통이었던 원흥이 마을의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되었던 것. 그 때부터 지금까지 햇수로 23년 동안 새마을지도자 일을 해 왔으며, 그 공로로 작년에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새마을지도자의 덕목은 ‘나눔, 봉사, 배려’입니다.” 수십 년 간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이어 오면서 스스로 깨달은 박문규씨의 철학이다. 그는 현재 ‘청주시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수석부회장’인데, 원래는 ‘청주시 새마을지도자협의회 회장’이었다. 청원군과 통합한 후 통합 청주시의 상생 발전을 위해 ‘회장’이라는 직책도 청원군 측에 양보했다고 한다. ‘나눔, 봉사, 배려’라는 자신의 새마을 철학을 실천했던 것이다.

“새마을협의회는 자발적으로 모인 봉사 단체”

현재 산남동 새마을지도자협의회의 남자 회원은 18명, 여자 회원은 25명이다. 이들은 힘을 모아 매년 6월이 되면 동네 16개 경로당에 계시는 150여명의 노인들에게 ‘삼계탕’을 끓여서 대접하고, 추석이 되면 송편을 빚어 나눠주고 겨울철에 접어들면 김장 김치를 담가준다. 올해는 500장 가량 사랑의 연탄 나누기도 했다는데, 그 재원은 휴경지에다 회원들이 옥수수와 고구마를 경작해서 생긴 수익으로 충당하고 부족한 것은 목포시 새마을지도자협의회와 자매결연으로 맺어 진행하는 ‘소금’ 판매, 회원들의 집안 등지에서 수거된 폐지나 고물 자전거 등을 판매하고 생긴 수익 등으로 보충하고 있다. 박문규씨는 “새마을지도자협의회는 자발적으로 모인 봉사 단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이들이 행하는 모든 봉사 활동은 ‘관변단체’가 하는 ‘시늉’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하는 진정한 봉사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 청주새마을지도자협의회 나기수회장
▲ 목포시 새마을지도자협의 송봉순회장
반평생 봉사로 살아 온 그의 삶은 가족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아내도 요양보호사로 활동하고 있고, 두 따님은 초등 특수교육과를 졸업하고 복지사가 되어 복지관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가족들 대부분이 ‘봉사’와 연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내 고향 산남동은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며 “내년에는 유수지 꽃길을 조성할 예정”이라는 박문규씨. 그는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산남동에서 봉사하면서 계속 살고 싶다.”고 껄껄 웃는다.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