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정이 엄마의 미소
요즘 두 돌이 지난 딸이 40도를 오르내린다. 겨울을 지나 봄이 왔건만 감기는 늘 달고 산다. 어제는 해열제를 억지로 먹였더니 먹은 걸 다 토해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울더니 지쳐 잠이 들었다. 자식이 아파하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은 괴롭다. ‘내가 아팠을 때 우리 엄마도 그랬겠지.’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나는 4남 1녀 중 막내다. 아버지는 내가 4살쯤에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 어머니 혼자서 다섯 남매를 키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방도 구하기 어려워서 몇 번을 이사 다녀야 했고,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홍역을 앓아서 학교를 쉬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 나가시고 저녁에 퇴근해서 바로 잠자리에 드셨다. 그리고 내 기억엔 어머니의 힘든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다만 세 번 정도 낮술 드시고 서럽게 우셨던 것은 기억난다. 그래서 난 거의 ‘스스로’ 컸다고 지금껏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음은 최근에야 알게 됐다. 딸 아이가 아프면서 말이다. 44년 만이다. 자식은 기억 못하지만 부모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리 딸내미도 내가 이렇게 노심초사했던 것을 기억 못 하겠지. 저 힘든 것만 알고 말이지”

 그렇게 내가 아버지가 된 후 ‘유정이’를 만난 건 산남두꺼비마을신문 SNS모임에서였다.
유정이는 지난 2013년 11월 7일 충북대병원에서 7개월 만에 심장이 멎은 채 태어났다. 심폐소생술에 의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유정이는 세상 빛을 보자마자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았고, 설상가상으로 간질경변, 뇌경변, 심장판막증, 지적장애 등 희귀성 난치병 진단을 받았

▲ 석션(혼합 가스나 공기 등을 빨아들이는 것)을 하고 있는 유정이 엄마
다. 이후 서울 건국대병원으로 이송된 유정이는 뇌손상이 심각한데다 체중 미달 등으로 수술조차 못하고 충북대 병원으로 내려왔고, 지금은 약으로 버티고 있다. 심장에 구멍이 나 있지만 손도 쓸 수 없는 처지다. 수술을 해도 현상유지일 뿐 회복되긴 어렵다. 그 점이 유정이 엄마의 결단을 어렵게 한다. 수술 중에 어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정이는 지금 17개월. 키 69㎝, 몸무게 6㎏의 작은 체구로 하루 24시간 누워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하고 있다. 유정이는 30분 간격으로 가래를 뽑아내기 위해 가느다란 고무관을 목에 집어넣는데, 그 작은 것이 힘이 드는지 끝나면 고사리 같은 손을 휘젓는다. 너무 힘들면 양 눈가로 눈물이 흐른다. 나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니 그 아픔이 가슴 깊은 곳까지 밀려온다. 그래서 필자가 속한 충북변호사회에서 유정이를 돕기 위하여 모금을 했고, 천만원을 모아 유정이를 관리하고 있던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탁했다.

▲ 충북변호사협회에서는 그동안 모은 성금 천만원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을 통해 유정이에게 전달했다.
유정이 돕기 모금과정에서 하나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일부에서 이런 논리를 주장했다. “도와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유정이는 수술을 해도 제대로 살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차라리 수술을 하면 회복이 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래 그것이 옳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례는 어떠한가.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다. 어떤 사람은 5m 근처에, 또 다른 사람은 멀리 50m 거리에서 살려달라고 한다. 그런데 구조자에게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50m 거리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눈에 띄었으니 줄이 거기까지 날아갈지 모르지만 일단 구해보겠는지, 아니면 가까운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구해야 하니 그 사람을 외면하고 가까운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려야 하는지.

 추가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사례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달리는 기차 앞에 인부 5명이 있다. 그런데 옆 비상철로에는 인부 1명만이 있다. 당신이 기관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비상철로로 틀 것인가? 그럼 이번에는 똑같은 폭주 기관차 앞에 인부가 5명이 있다. 그대로 가면 그 인부들은 죽는다. 그런데 마침 당신의 옆에는 덩치가 산만한 사람이 있어 그를 밀어버리면 인부 5명을 살릴 수 있다. 그 사람을 밀어버릴 것인가? 대부분 앞 사례에서는 비상철로로 방향을 틀 것이고, 뒤 사례에서는 감히 그 덩치를 밀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전자는 5명보다는 1명이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나, 후자는 아무리 명분이 옳아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 차이에 대해서 마이클 샌델은 우리가 느끼는 ‘압박감’에 주목한다. 앞 사례는 우리의 행위가 개입되지 않지만, 뒤 사례는 우리의 힘이 개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추론은 자신의 신념이자 생각을 나타낸다.

 ‘유정이’는 위 사례 중 어느 쪽일까? 후자에 가깝다. 유정이의 존재를 안 순간부터 그것을 외면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가끔은 머리보다 가슴을 따르는 것이 정답일 때가 있다. 그리고 마음을 써야 행동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벌써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가끔은 눈부신 날이 누군가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힘내라 유정아!

최우식 변호사(사람&사람)

▲ 최우식변호사(사람&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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