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한식관 주동일 사장, 연변대학 대학원생 강림
문득 지난 1월 중국 동북여행에서 만난 주동일(朱東日) 사장과 고량주를 마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주 사장은 연길(延吉)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의 사장. 3주에 걸친 연수 기간 동안 학생들이 중국음식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학교(연변대학) 측에서 배려하여 정해 준 '일미한식관(一美韓食館)'의 사장이었다. 우리는 평일 조석으로 거의 인사를 나눴는데, 귀국하기 얼마 전 그가 고량주 한잔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일면식도 없던 우리는 ‘고량주 한잔에 인생 한 장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날은 마침 두만강과 인접한 도시인 도문(圖們)에 갔다 온 날이었다. 도문에 다녀왔다고 하자 뜻밖에도 그는 자기 고향이 도문이라며 어린 시절 두만강에 얽힌 추억을 들려주었다. 본인이 어렸을 때만해도 두만강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고, 물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물도 좋았다고 했다. 북한 아이들하고 두만강에서 멱을 감으며 놀다가 장난도 치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어 아쉽다고 하면서 술잔을 비웠다.
주 사장은 도문에서 자라 연길의 ‘제1중학’을 거쳐 연변대학교를 졸업한 조선족 엘리트였다. 그가 한국과 직접 인연을 맺은 건 우리나라 대기업 ‘현대(現代)’에 입사하게 되면서부터다. 졸업 후 한국으로 와 ‘현대’에서 연수를 받고 산동성 청도(靑島)의 현대 법인으로 발령받아 근무를 했으며, 퇴직한 후 상해(上海)에서 사업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식당을 열게 된 사연이 고량주 술잔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 술자리에는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된 또 한 명의 조선족 청년 강림(姜林)도 있었다.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에서 태어나 용정(龍井)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연길의 연변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전형적인 연변 조선족 청년이었다. 그와 함께 화룡, 용정, 도문, 길림 등지로 여행을 다니면서 연변의 많은 문화적 정보와 그의 개인적인 사연도 알게 되었다. 그 역시 증조부가 함경북도에서 이주하게 되면서 연변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이날 우리는 셋이서 그 독한 고량주를 무려 네 병이나 마셨다. 동포를 만난 정분(情分)으로 한 병 또 한 병 하다 보니 네 병이 된 것이다. 고량주 술잔 속에는 곡절 많은 가족사에 대한 애환도 묻어나왔다. 실은 주동일 사장 등 조선족이 생활하는 연길은 한때 ‘간도(間島)’라 불리던 땅이었다. 역사적으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린 발해(渤海)의 터전이었으며, 근대 시기에는 옥토(沃土)를 찾아 떠난 조선인들이 너른 들판을 일구며 민족문화를 유지하며 살아왔던 생활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중수교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평온하게 살아왔던 연변 조선족 사회를 오히려 크게 동요시켰다. 주 사장처럼 일부 조선족들은 취업 등을 이유로 상해, 청도 등 중국의 대도시로 이주했고, 일부는 같은 민족국가인 한국으로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자녀들을 민족학교가 아닌 한족(漢族)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고국인 한국에 와서도 ‘국적은 중국, 민족(혈통)은 한(韓)민족’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에 시달려야 했다. 냉엄한 ‘국가’ 논리와 사회적 멸시와 차별이 이 같은 정체성 혼란을 낳은 것이다.
주 사장과 강림이 수행한 것처럼, 한중수교 이후 연변의 조선족들은 한국과 중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 왔다. 향후 한국과 중국 및 동북아시아 번영을 위해서라도 그 ‘다리’는 여전히 필요할 뿐만 아니라 조선족(중국동포)과의 진정한 연대는 민족문화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따라서 서로 ‘마음의 국경’을 허물고 동포애로써 교류하는 게 시급하지 않은가, 그래야만 옹근 상생(相生)을 이룰 수 있을 터이니…… 이런 상념에 젖다보니 어느새 술자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조현국(산남유승한내들 입주자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