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아침, 독자 여러 분에게 신년 덕담 삼아 함께 새겨 보고 싶은 화두 하나를 제시해 볼까 한다. 서경(書經)의 한 구절인 ‘구대동존소이(求大同存小異)’ - 여섯 글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흔히 쓰이는 대동소이(大同小異)란 말의 본딧말이다. 1950년대 중반, 중국의 주은래가 제3세계 외교무대에서 지침으로 삼기 위해 이를 ‘구동존이(求同存異)’로 줄여 쓰면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요즘도 이 개념은 중국 외교의 주 전략으로 쓰이기도 한다. 육자회담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북?미간에 “차이는 접어두고 공통분모를 찾자”며 중국이 내세운 중재논리도 바로 이것이었다.


같음과 다름은 인간사의 모든 대립과 갈등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일찍이 전국시대 때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같음 가운데서 다름을 구한(同中求異)’ 공손룡과 ‘다름 속에서 같음을 구한(異中求同)’ 혜시의 논쟁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그들의 논쟁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전제 위에 있었다. 그들의 주장들이 글자의 순서와 방점이 다를 뿐, 어느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한 것이 없는 것처럼…. 주은래는 그 논쟁의 결론이 이미 고전(서경)속에 있음을 찾아, 바로 그것을 다변화된 국제관계의 해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크게 같음을 좇아, 작은 차이를 덮어두라”는 뜻의 구동존이. 이 말에 비추어 보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 사회는 자신과 다른 남을 얼마나 인정하고 포용하는가. 혹, 자신과 ‘다른’ 것은 아예 ‘틀린’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지는 않는가. 생각이나 취향조차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자신에 맞출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가.


이번 대선 당선자의 최우선 공약이 ‘국민대통합’이다. 그는 그 표현만으로도 아쉬웠던지 ‘100% 대한민국’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말은 또 무슨 뜻일까. 모든 국민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뜻일까. 하나가 된다는 것은 대동(大同)일까, 일색화일까.
의심할 것도 없이 “모든 국민이 크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먼저 이룰 것이 구동존이다. 대통합도 차이를 용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존중 없이는 그 어떤 용납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선자는 또 “세상을 바꾸는”, “시대교체”를 역설하기도 했다. 이것도 “모든 국민들이 차별 없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해, 그렇지 못했던 세상, 거꾸로 가던 시대를 바꾸겠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설마 100%국민들이 같은 생각만 하도록 하던 유신시대로 되돌리겠다는 말이었으랴! 앞에 말한 뜻이 아니고서는, ‘100%’란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쓰일 수 없는 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똑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좋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체제다. 100%일색보다 각양각색이 더 아름답고 용량도 활력도 크다는 것이 이 체제의 강점이다. 그가 말한 ‘원칙’과 ‘신뢰’도 그에 바탕한 것임을 믿으며, 지켜 볼 일이다.

                                김병우 (충북교육발전소 상임대표, 산남 리슈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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