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에도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앨버트 허시먼의 ‘반동의 수사학(The Rhetoric of Reaction)’을 보면, 보수주의자들이 개혁에 저항하면서 내세우는 세 가지 ‘꼼수화법’들이 분석돼 있다.

그 첫 번째가 “도리어 엉뚱한 결과만 낳을 것”이라는 ‘역효과 명제’다. 변화를 향한 그 어떤 노력도 도리어 환경을 악화시킬 거라는 딴죽 걸기. 일테면 ‘찬물 끼얹기’나 ‘재 뿌리기’다. 무상급식을 하자고 하면 급식의 질이 떨어질 거라고 초를 치고,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자면 교권이 추락될 거라며 다리를 건다. 심지어는 학생인권조차 도리어 짓밟힐 거라며 덤터기를 씌운다.

학생인권조례로 학생인권이 도리어 후퇴? 상식적으로도 황당하지만 그들의 비틀기는 상식을 넘어선다. “일탈학생의 인권을 보호하려다 보면, 그로 하여 피해를 보는 더 많은 아이들의 인권과 학습권이 침해될 것(동아 사설)”이란다. 그들의 뇌리에는 아직도 “다수의 안녕을 위해 소수의 인권은 짓밟아도 된다”는 케케묵은 ‘일벌백계’론과 파시즘의 잔영이 깊다.

두 번째는 ‘무용 명제’다. 변화를 꾀해 봤자 별로 달라질 게 있겠느냐는 어깃장. 이른바 ‘김 빼기’와 ‘물 타기’다. “해 봐야 별 거 없다”면서 효과에 김을 빼고 필요성에 물 타기를 한다. 무상급식을 ‘부자급식’으로 이름붙이고 “부잣집 애들까지 왜 공짜 밥을 먹이는가?”면서, 그 돈으로 차라리 어려운 아이들을 더 돕는 게 낫다고 고양이가 쥐 걱정하듯 엉너리를 친다.

아이들은 미숙하고 배우는 존재라 기본권 쯤 제한해도 마땅한데 인권조례가 무슨 소용이냐는 핀잔이야말로 무용론의 전형이다. 인권조례 없이도, 학교별 학칙만으로도 학생인권은 충분히 존중된다는 무개념 딴청 부리기도 같은 수준이다.

세 번째가 ‘위험 명제’다. 변화나 개혁에 드는 출혈이 너무 커, 여태 일궈놓은 가치들마저 되레 위험에 빠질 거라는 겁박. 아이들 말로 하자면 ‘고춧가루 뿌리기’나 ‘소금 뿌리기’다. 무상급식의 기대가 높아지면 세금폭탄을 들먹이거나 ‘배급제 급식’ 딱지로 레드 콤플렉스를 부채질한다. “대학 반값 등록금은 자기 노후연금을 빼먹는 바보짓”이라며 빈정대고,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나 있다”면서 보편적 복지 확대가 거지근성을 키우고 복지병을 만연시킬 인기영합주의(populism)라고 못을 박는다.

이런 위험론은 학생인권조례에도 어김없이 동원된다. 학생인권 신장이 학교 황폐화로 이어질 거라는 으름장, 학생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주자는 것도 “홍위병으로 만들려는 불순한 의도(조선 사설)”라는 덧칠이나, ‘성적(性的) 지향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동성애 조장으로 몰아가는 비아냥거림이 똑 같은 코드다.

보수와 진보 양쪽 학계에서 공히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허시먼. 그의 이 같은 명제들을 새기다 보면, 우리 교육의제들 앞에 놓인 돌부리가 무엇인지 훤히 보인다. 그리고 그 돌부리들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도.

김 병 우 <‘행복한교육발전소(준)’소장, 산남 계룡 리슈빌>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