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정의의 한계와 겸허함에 대한 단상

 

요즘 개그콘서트의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코너가 인기다. 결혼 축의금을 얼마를 해야 하는지, 연인간에 스키십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조각은 누가 먹어야 하는지 등 우리 일상에서의 애매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 일정한 기준을 정해주는 개그코너다.

 

‘애정남’에서 개그맨 최효종은 위와 같은 기준을 정해주면서 앞으로 모두 이 기준대로 하자고 하며, 다만 “이것을 어겼다고 쇠고랑 안 차고 경찰차 출동하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떤다. 결국은 49와 51의 애매한 상황에서 앞으로 51로 하되, 이는 임의로 따를 뿐 법적으로 강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유가 조금 그렇지만, 필자는 법관, 검사도 이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또는 여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당사자들이 무죄를 주장하거나 배상 자체 여부에 대하여 다투는 사건에서도 그렇고, 범행을 인정하되 다만 실형, 집행유예, 벌금형 등 양형에서의 선처를 바라는 사건, 손해배상액수의 정도에서만 다투는 사건에서도 모두 그렇다. 다만 수사기관이나 법원의 판단은 애정남과 달리 법적으로 강제가 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쇠고랑을 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일전에 칼럼에서도 썼듯, 일반인들은 분쟁중인 사건에 대하여 사법에는 명쾌한 해답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물론 일부 사건에서는 명쾌한 해답이 있을 것이지만, 대체로는 유무죄는 물론 양형, 손해배상 액수 등에 대한 이미 정해진 명쾌한 정답은 없다. 나아가 분쟁중인 사건에 명쾌한 해답이 있으면, 사법 알고리즘을 갖춘 컴퓨터만 있으면 되지, 변호사가 필요 없을 것이다.

 

나아가 분쟁중인 사건에 명쾌한 해답이 없는 것처럼, 분쟁중인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실제 진실은 아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인권탄압 판결에 대하여 민주화에 따라 회고적으로 문제 삼은 것을 제외하고도 대법원에서까지 유죄가 인정되어 실형을 복역하다가 나중에 실제 진범이 규명되어 무죄로 번복된 예처럼, 실제 진실과 사법판단은 다른 것이다.

 

결국 사법적 분쟁 자체가 애매한 것이고, 그를 일도 양단하는 사법 정의 자체도 실제 진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함에도 애정남과 달리 사법적 판단을 정의로 간주하여 쇠고랑을 채울 수 있고, 경찰차가 출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실제 정의는 아니지만 정당하기에 정의라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느 편이 옳은지, 무엇이 정의인지 알지 못하고, 서 로간 다툼이 있으니, 제3자가 일정한 공정 절차에 따라 판단하였을 때 그것을 정의로 하자고 합의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법원에 의하여 유죄선고를 받으면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간주되어 수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법은 정의가 아니라 단지 일정 절차를 통하여 또는 통하였기에 정당화 될 뿐이다.

 

지금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정의에서의 사법 만능주의나 역으로 그 실제적 한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판단에 대하여 정의라고 확신에 찬 나머지 무리한 수사, 재판을 하고, 당사자의 주장을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표현하는 일부 법조인들을 보는데, 그들에게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은 51%의 진실일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실제 진실이 아닌 정당화 되었을 뿐인 진실, 51%의 애매한 진실일 뿐임에도 쇠고랑 차고 경찰차가 출동하는 막중한 결과를 낳는 애정남이기에 더욱더 겸허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최용현 변호사(법무법인 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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