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대하여

 

우리나라에는 4개의 ‘공화국’이 있다. 헌법전에 있는 민주공화국과 언론에 자주 회자되는 삼성공화국, 서울공화국, 검찰공화국이다. 후3자는 이들의 압도적 혹은 무소불위의 권력과 지배력을 풍자하기 위함일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첫 시작인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당당히 선언하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법적 의미인지에 대하여는 바로 뒤따르는 제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표현되어 있다. 정치권력의 근원이 국민에게 있다는 즉 主權在民, 人民主權이라는 말이다.

18세기 프랑스 인권선언과 미국독립선언문은 ‘모든 인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갖는다고 하고 모든 인민의 정부를 선언하고, 19세기 중반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라고 하였지만, 사실 이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18세기 혁명과 독립이후의 헌법으로의 제도화 과정에서 19세기 중반 미국 남북전쟁이후에 이르기까지 인민주권, 이를 현실화한 정치권력에의 참여의 권리로서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모든 인민에게 있지 않고 극소수의 재산을 갖춘 자들에게만 있었다. 빈민, 노동자, 여성, 소수종족 등의 절대 다수는 선거권을 갖지 못한 시민 아닌 신민(臣民)에 불과하였고, 심지어 일부의 인간은 노예로 인간이 아닌 재산으로만 취급되었다.

20세기초 유럽과 미국에서 모든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제도가 일반화 되었다(비록 미국에서 흑인들이 실제 투표권을 부여받은 것은 1960년대 이후이지만). 그러나 보통선거제도가 시행되었다고 하여 인민주권, 민주주의가 제대로 관철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18세기 프랑스의 혁명사상가였던 루소는 당대의 영국의 대의제를 조롱하며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의원을 선출하는 동안에만 그렇다. 의원이 선출되자마자 인민은 노예가 된다”라고 하였다.

사실 루소는 자신의 인민주권, 직접민주정치론을 강조하기 위하여 위와 같이 억지스런 풍자를 하였지만, 오히려 현대의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풍자를 민주주의의 정의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슘페터, 노직, 하이예크로부터 비롯된 현대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는 그들을 지배할 대표를 선출하는 것, 지배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민주주의는 4-5년마다 대통령이나 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하여 받는 투표용지 1장의 의미밖에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민주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은, 공동체내의 한정된 가치를 보다 평등하게 배분하고 정치 이전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제어하기 위함이다. 만약 정치가 자연 상태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제어하지 못하고 나아가 정치가 그 불평등을 강화한다면, 민주주의가 단지 공동체를 대표할 자를 뽑는 종이용지에 불과하다면, 그 정치․민주주의는 백해무익할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에 등장한 노동자․빈민․여성․소수자들의 절차적 평등(보통선거권)을 넘는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평등을 도모하는 사회민주주의나 지역․지방정치와 직장․관료조직․학교․가정 등 사적영역으로의 민주주의 확산을 도모하는 참여민주주의는, 우리의 정치, 민주주의를 정상화 시키고자하는 노력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은 18세기 프랑스 인권선언과 미국독립선언상의 ‘모든 인민의 권리와 국가’ 선언처럼 단지 헌법전속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4-5년마다 마지못한 받아드는 투표용지 1장의 의미도 아니고, 선출된 대표자들의 무소불위의 권한행사를 정당화시키는 절차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민주공화국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그 헌법 규정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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