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솥 안 개구리’의 ‘리스크’ 타령

 

‘솥 안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라는 은유가 있다. 뜨거운 물이 든 솥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살려고 즉각 튀어 나오지만,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하면 삶겨 죽어가면서도 상황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미국의 교회운동가 조지 바너가 현대문명 속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두고 한 비유다. 현대문명 속에서 인간들이 생명을 갉아 먹히면서도 그런 줄을 모른다는 경고를 그 표현에 담았다.

이 은유 속 개구리는 상황인식과 환경변화에 둔감한 존재로 표현되지만, 실제 자연 속의 개구리는 오히려 ‘환경지표종’이다. 자연환경의 변화에 둔감한 인간에게 환경오염의 위험성을 일깨워주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요즘, 지구 온난화 등에 따른 기후 변화로, 개구리 같은 양서류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환경변화에 민감하고 저항력이 약해서일 텐데, 그 양서류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이 농약 같은 오염물질이라고 한다. 양서류들은 피부로도 호흡을 해 항상 피부가 젖어 있어야 하는데, 유독물질에 노출되면 (농약의 원리가 본래 그렇듯) 삼투작용에 의해 유독성이 그대로 몸 안으로 침투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오송 금개구리 서식지를 둘러보던 현장에서 “주민들의 생목숨이 달린 판에 금개구리가 다 뭐냐!”면서 “온 들판에 농약을 죄다 뿌려버릴 것”이라던 주민들의 날선 항의가 예사롭잖게 들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자성어에 ‘부중지어(釜中之魚-솥 안의 물고기)’라는 말도 있다. 끓여질 운명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설렁설렁 헤엄이나 치는 신세(또는 그런 어리석음)를 이른다. 그런데, 그 물고기를 건져내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의 운명이나 위기의 실체와 본질을 모르니, 물고기는 그저 잡히지나 않으려고 버둥댈 것이다. 사는 길이 무엇이고 어느 것이 구원의 손길인지도 알지 못하니, 요릿감 처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숱한 개발의 현장들에서, 당장의 개발이익에 눈먼 이들이 내보이는 “생태운동이 도리어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반응들이야 말로, 살 길과 죽을 길을 분간 못하는 부중지어나 다를 게 뭔가.

‘독 안에 든 쥐’라는 속담도 있다. 상황인식이나 위기의식은 위의 예들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독 안에 빠져버린 이상 알아차려도 이미 벗어날 길이 없는 신세임은 별로 다를 게 없다.

지난 수 세기, 인간은 문명과 개발의 이름으로 지구의 유한한 자원과 환경을 탐욕스럽게 갉아먹고 훼손해왔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신의 생명줄을 갉아먹는 것인 줄 알지 못한다.

언제까지 이래도 되는 것일까. 환경 지표종들이 줄어들면서 생태 위기를 알리고 있고, 나날이 심상찮은 기후 변화가 환경의 역습을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발론자들은 환경위기도 리스크(risk)일 뿐이라는 주문(呪文)같은 타령을 늘어놓으며 위태로운 ‘삽질’을 계속한다.

솥 안 개구리의 위기가 정말 데인저(danger) 아닌 리스크일까. 지켜만 보고 있기엔 너무도 두렵다.

김 병 우 <‘행복한교육발전소(준)’소장, 산남 리슈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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