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우의 교육이야기 41

학교 환경교육의 장애물들

산업혁명 이후 수 세기, 문명의 이름을 빌어 환경파괴를 일삼아 오던 인간이, 반성적 성찰을 시작한 것이 이제 40여년. 그로부터 개발보다 보존이 ‘생태적 삶의 길’이라는 인식이 늘고, 그 지평을 넓혀가려 한 환경교육도 틀을 잡아가고 있다. 1977년 ‘트빌리시 선언’은 환경교육의 필요성을 전 지구적으로 확인한 역사적 천명(闡明)이었다.
우리 환경의식이 높아진 것도 그 후였다. 1970년대 무분별한 막개발로 환경파괴와 공해문제가 잇따르자, 민간에서도 환경운동이 태동하고 정부는 ‘환경청’을 신설(1980)하는 한편, 제4차 교육과정(1982)에서 환경관련 내용을 담도록 했다.
환경이 독립교과로 된 것은 제6차 교육과정(1995)부터였다. 그 후 초등은 학교재량시간으로, 중학교는 선택교과로, 고등학교는 교양․선택교과로 운용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 환경교육이 넘어야 할 장애물들은 많다. 그 중 가장 완강한 장벽은 필요성을 두고 느끼는 인식차이다. “아직은 보존보다 개발이 우선”이라는 시각은, 때로 환경운동이나 환경교육에 대해 한가하게 보거나 성가시다는 반응을 넘어 위험하다고까지 몰아가기도 한다. 몇 년 전 초등학교 환경교과서 내용을 둘러싼 해프닝이 대표적 예다.
2006년11월8일자 ‘한국경제’신문은 “황당한 초등생 환경교과서”라는 제하의 기사로, 환경교육에 이념문제를 걸고 나섰다. 초등학교 5~6학년용 교과서의 ‘생태발자국 지수’와 ‘슬로우 라이프’, 3~4학년용의 ‘환경문제 원인 찾기’ 같은 내용들이, 기업과 부자들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은, 편찬에 관여한 25명중 집필과 검토과정에 각1명씩 총2명의 전교조 교사가 있더라면서, 교과서가 특정이념으로 오염된 증거라며 물고 늘어졌고, 조선일보는 기획기사와 시론 등을 통해 ‘反시장, 反기업, 反문명적 좌편향 환경교과서’라는 딱지를 붙여 버렸다.
그들이 상식 수준의 환경의식이나 초등생 수준의 환경감수성만 가졌어도 문제제기 자체가 스스로 낯 뜨거웠을, 황당한 시비였다. 환경교육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반추되는 일화이기도 하다.
환경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이들일수록, 요즘 학교 환경교육의 실상에 대해서도 아쉬워하는 시각들이 많다. ‘재량~선택~교양’이라는 과목성격에 비치듯 채택률도 30%에 못 미치고, 채택하고서도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생태와 환경’수업의 경우, 아예 수능대비 주요과목 자습으로 때우기가 일쑤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환경교육 전공교사들도 양성만 해 놓고 몇 년째 신규임용이 손꼽을 정도에 그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단면들만이 우리 환경교육의 실상인 양 말할 수는 없다. 교원연수강화 등 전문성 제고를 위한 노력들과, 관심 있는 교사들에 의한 환경교육운동의 확산 등, 긍정적인 부분들도 적지 않다. 환경교육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이 부분들이 학교 환경교육을 이끄는 희망이 될 것이다.
김 병 우 <‘행복한교육발전소(준)’소장, 계룡 리슈빌>

 

김병우의 교육 이야기 42

‘솥 안의 개구리’가 될 것인가

‘솥 안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라는 은유가 있다. 뜨거운 물이 든 솥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살려고 즉각 튀어 나오지만,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하면 삶겨 죽어가면서도 상황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미국의 교회운동가 조지 바너가 현대문명 속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두고 한 비유다. 솥 안 개구리의 둔감함을 비웃는 인간이, 정작 자신들도 현대문명 속에서 생명을 갉아 먹히면서도 그런 줄 모른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이 은유 속의 개구리는 인간이 설정한 상황 속에서 변화에 둔감한 존재로 표현되었지만, 실제 자연 속의 개구리는 오히려 ‘환경지표종’이다. 자연환경의 변화에 정작 둔감한 인간에게, 환경오염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요즘 지구 온실효과 등에 따른 기후 변화로, 특히 개구리 같은 양서류들이 급격히 줄고 있음은 앞선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환경변화에 민감하고 저항력이 약하다는 얘기다. 특히 농약 같은 오염원이 치명적인 것은 피부로도 호흡을 하는 특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피부가 항상 촉촉이 젖어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오염물질에 노출되면 그대로 몸 안으로 흡수되고 만다는 것이다.
지난 번 오송 금개구리 서식지를 둘러보던 현장에서, “금개구리가 주민들의 재산권보다 중요하단 말이냐!”면서, “온 들판에 농약을 퍼부어 버릴 것”이라며 눈에 불을 켜던 주민들의 날선 항의가 섬뜩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한자성어에 ‘부중지어(釜中之魚 ; 솥 안의 물고기)’라는 말도 있다. 솥에 끓여질 운명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설렁설렁 헤엄이나 치는 물고기 신세를 말한다. 둔감한 것은 솥 안 개구리와 비슷하지만, 뉘앙스는 다소 다르다. 솥 안 개구리가 변화에 둔감한 데 초점을 두고 있다면, 부중지어는 위기를 모르는 채로 유유자적하는 어리석음에 방점을 둔다.
지난 수 세기, 인간은 물질문명이라는 이름의 과소비로 흥청거려 왔다. 유한한 자원과 환경을 무한정 퍼내도 되는 ‘화수분’인 양 여기며, 흥청망청 파먹어 가면서도 정작 그것이 자신의 생명줄을 갉아먹는 것인 줄 모른다.
그 솥 안의 물고기를 건져내려고 하면 물고기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것이 구원의 손길인 줄도 모르고, 당연히 피하려고 버둥댈 것이다. 숱한 개발의 현장들에서 당장의 개발이익에 눈멀어, 생태운동이 도리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줄 아는 것이야 말로, 부중지어와 다를 것이 없다.
‘독 안에 든 쥐’라는 옛 속담도 있다. 상황은 위의 예들과 흡사하지만 이 경우는, 알아차려도 이미 벗어날 길이 없어져 버린 신세를 이른다.
우리의 환경을 이처럼 솥이나 독 같은 ‘궁지’로 만들어 갈 이유는 없다. 생태 환경만이 생명을 품어 살린다. 훼손이 지나치면 ‘환경의 역습’이 시작될 터. 개구리들이 그것을 알려 줄 거라고 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다만 그 여지도 재앙이 닥치기 전까지에 한해서 만이다.
김 병 우 <‘행복한교육발전소(준)’소장, 계룡 리슈빌>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