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왜 굳이 ‘학생인권’인가

김 병 우
  (교육칼럼니스트, 계룡 리슈빌)



일전에 필자가 충북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본부 대표로 기자회견을 했더니, 보도를 본 지인이 걱정스런 전화를 주었다. 교사들 사이에 학생인권조례로 교권이 위축될 거라는 우려가 돌고 있는데, 그 일에 앞장서면 교사들의 원망을 사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보수언론과 수구집단은 “인기영합적인 선동을 당장 그만두라”고 거품을 무는데, 정작 학부모들 관심은 시큰둥하다는 것이었다.
학생인권에 대한 세간의 몰이해들을 전하면서, 그 필요성부터 제대로 알릴 것을 일깨워주는 고마운 염려였다.
학생인권조례는 무엇보다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예의다. 아이들도 사람이거늘,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해도 될까. 사물과 일에도 예를 갖추는데, 아이라고 막 대해도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배우는 처지라고 막 대하면서 어찌 교육의 명분을 찾으랴. 우리사회도 이제 그 정도의 격조를 갖출 만큼은 되지 않았나.
그냥 학생의 권리가 아니라 굳이 ‘학생인권’이라고 부르는 취지부터 주목하기 바란다. 사회의 소수자들은 인간적 대우부터 목말라한다. 역사를 열어온 모든 권리투쟁들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데서 출발했다. 인권 사각지대에 있어온 우리 학생들의 경우도 인격적 대우부터 바란다. 이것부터 공감해주는 ‘인권 감수성’이 조례제정운동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오해부터 걷어내자. 학생인권과 교권은 충돌하는가. 교권을 교사의 권리(right)로 보더라도 이 일로 교사의 지도권이 침해될 리 없다. 체벌문제만 봐도 누가 누구를 때릴 권리란 문명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교육을 내세워도, 체벌은 때리고 맞는 양측 모두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필자에게도 ‘회초리에 의존하던 모범교사’시절이 교직생활 20여년 중 가장 부끄러운 그늘로 남아 있다.
두발과 복장,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의 선택도 지도권 이전의 인권 문제다. 어리다고 제 몸가짐과 자율학습까지 시킴 받아야 할까. 그것들이 단지 선택권을 누가 가지느냐의 문제에 앞선 ‘인권’사안이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흔히 쓰는 교권의 개념은 실은 교사의 권위(authority)다. 그것은 학생인권조례로 훼손되는가. 그 역시 천만의 말씀이다. 강압과 강제에 의존하는 권위는 허깨비다. 일제 땐 교사에게 칼을 채우기도 했지만, 그렇게 세워질 권위라면 회초리로 되랴, 권총을 채워도 부족할 것을.
“학생들의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UN아동권리선언도 교문지도에서 걸러진다. 군대나 교도소에서도 사라진 방식들이 조폭집단과 학교에만 여전하다.
올3월에 와서야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신체나 도구로’ 고통을 주는 체벌 금지조항이 명시되었다. 이제 ‘사랑의 매 전달식’ 같은 해프닝은 없어질까. 하지만 때리지 않는 벌이나 폭언 같은 비인격적 지도는 여전히 열려있다. 그에 따라 바뀐 학칙도 여전히 규제와 금지 투성이다.
속히 공론화를 벌여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학교를 더욱 인권친화적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것이 조례제정운동의 일차 목표다.


김 병 우 (교육칼럼니스트, 계룡 리슈빌)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