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근변호사(법무법인 청주로)
얼마 전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있은 마라톤에 다녀왔다. 높고 맑은 하늘, 하늘과 주변 산들을 여러 색깔로 담아낸 대청호, 들판의 누런 벼.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달리는 기분이 무척 상쾌하였다.
그 기분 좋음이 며칠은 갔다. 그런데 지금까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마라톤에 참가하기 바로 전, 안내에 따라, 주차를 위해 문의초등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흙으로 된 널찍한 운동장에 여유있게 차를 세우는 것을 기대했는데,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운동장 가운데는 인조잔디로 '산뜻하게' 덮여 있고, 그 둘레는 빨간색 트랙이 덮고 있었다. 트랙 바깥도 초록색 합성수지로 덮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넓은 운동장 어디에서도 흙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몇 년 전 경기도 김포시의 한 초등학교에 가서 본 운동장이 떠올랐다. 그 학교도 문의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운동장 전부에 인조잔디, 트랙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울타리 부근까지 빈틈없이 깔린 초록색 합성수지 위에, 흰색 페인트로 사방치기 놀이 그림이 똑같은 크기로 두 개 그려져 있었다.
기가 막혔다. 아이들은 넓은 운동장에서 땅에 금을 긋고 할 수 있는 놀이는 사방치기밖에 없었다. 그것도 크기가 미리 고정된 것으로.
난 교육 현장에서 이런 몰상식이 '당당하게' 저질러지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교육에 대한 참다운 이해가 있다면, 이런 몰상식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
교육이 무엇인가. 나 자신과 주변을 잘 이해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주변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 아닌가.
저렇게 인조잔디 등이 깔린 운동장 위에서 자신이나 주변에 대한 이해가 과연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모든 생명은 변한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이와 같은 생명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흙과 함께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식물은 흙이 씨앗을 보듬어야만 싹을 틔우고 자란다.
동물의 경우, 육식을 하더라도 먹이사슬 맨 아래의 피식자 동물은 초식을 하므로, 결국 동물들도 흙과 그 흙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교육이란 위와 같은 변화를 제대로 배우게 하는 것이다. 교육은, 아이들이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의 거역할 수 없는 변화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신을 알고, 자신이 나아갈 바를 스스로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흙이 아닌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변화를 배울 수 없다. 풀이 나지 않고, 벌레도 기어다니지 않으니, 거기엔 생명의 변화가 없다.
또 아이들은 대부분 축구장으로 만들어진 인조잔디 위에서 달리 금을 긋고 야구나 피구를 할 수 없다.
비석치기나 공기놀이도 쉽지 않다. 흙바닥처럼 글씨나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에도 변화나 창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오로지 인조잔디 따위에 의해 미리 정해진 놀이, 행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자연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도 성적만 좋으면 괜찮다고 해야 하는가.
전에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 서울의 한 연립주택 반지하에 살았다. 창밖을 내다보면, 눈높이와 바깥 콘크리트 바닥의 높이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시험 준비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 창밖을 바라봐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콘크리트 바닥의 갈라진 틈 사이로 난 풀 한 포기에 눈길이 닿아, 한참동안 그것만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삶에 대한 의욕이 샘처럼 솟아났다. 아이들은 흙을 밟을 때만 인생과 자연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우리 아이들, 제발 흙좀 밟게 해 주세요!

오원근 변호사(법무법인 청주로)

※ 이 글은 2010년 10월 7일 충청투데이에 실렸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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