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교’는 2015년 박범신 작가의 장편 소설이다. 훗날 정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박해일과 김고은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과감한 노출 장면과 노인과 소녀라는 관계로 세상의 관심을 받는 작품이다. 과거 독서모임에서 선정해 읽고 감상문 적어봤다. 책으로 읽어볼 만해서 일독을 권하는 작품이다.
뼛속까지  시린 2월, 난로를  등지고  오랜만에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생각해  보면 소설책을  읽은  지 얼마  만인가  기억조차 아득하다. 빡빡한  일상에  말랑거리는  소설책을  펴들었지만, 내용은  녹록지  않다. 70살의  시인이 17세의  여고생을 흠모하며  사춘기  소년처럼  소녀의  자잘한  이야기와  싱그러운 외모에  빠져 은밀한  내면의  세계를  고백하는  내용이다. 
다른  이야기는  차지하더라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살 떨리는  흥분으로  하루를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이  늙어가는  것이지  마음이  늙어가는  것은 아니다. 풋풋한  사랑이  젊은이와  사춘기  소년, 소녀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까닭이다. 화덕  위에서  굳어가는  빵의  표면처럼  서서히  굳어 밀가루  반죽의  말캉거리는  속살  느낌은 점점  옛것이  되어간다.
누군들 부끄러워 살포시 붉은 물 들어가는 홍조의 뺨을 가져보지 않았냐 만은 세월에 치여 그 아련한 기억조차 사치로 인식되는 바쁜 시간에 살고 있다. 매임은 방만한 감정을 묶어 편안함을 주지만 때론 불쑥 솟아나는 치기와 욕망마저 억누르기엔 타고난 본성이 강하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자신을 돌아보지만 가끔은 이름 뒤에 숨겨진 내면의 은밀함이 사람답게 살고 있음을 증명할 때가 종종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나 사랑을 달군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은 뜨거웠으나 지독한 증오만이 결정처럼 남았다. 조각가로서 영감을 주고받는 관계는 아름다웠지만 이후 30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고 생을 마감한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에 대한 사랑을 증오로 돌려놓고 말았다. 사랑은 때론 불꽃처럼 삶을 송두리째 불태울 만한 치명적 위험을 도사리고 있어 역설적으로 더 아름다운지 모른다.
선악과를 따 먹고 신의 노여움을 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이브 또한 유혹을 벗어나지 못해 원죄의 굴레를 쓴 것처럼 유혹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가 있다. 당나라 현종은 며느리인 양귀비를 얻기 위해 태자를 변방으로 쫓아내 인륜을 저버렸지만 안녹산의 난 속에서 사랑한 여인 양귀비와 함께 난을 피해 달아났으니 추하다고 하는 것은 세간의  평일  뿐 현종의  변은  다를  수 있다.
섹스는 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그리워하며 동동거리는 설렘으로 손녀뻘 되는 은교를 사랑한 고희(古稀)의 이적요라는 시인과 스승이 좋아하는 은교를 좋아하며 속으로 스승을 경멸하는 이지후의 삶, 결국 스승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의도를 눈치채고도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지후와 제자를 죽인 죄책감과 사회적 통념을 벗어난 사랑을 했다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생을 마감한 이적요, 그리고 둘 사이를 넘나들며 한쪽에서는 육체적 사랑을, 한쪽으로는 자상함을 넘어선 육체적 욕망을,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한 은교의 행동조차 옳고 그름의 시각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다. 아니 인간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른다.
사랑은 어쩌면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사랑은 편향적 감정이며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의 쏠림이다. 사랑의 완결은 없다. 늘 과정만 있을 뿐이다. 결혼을 사랑의 종착이라 볼 수 없다. 사랑의 갈구는 결혼 생활을 통해서도 지속된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사랑을 찾는 과정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불륜으로 규정한다. 어찌 보면 사랑엔 금기가 없다. 감정에 충실하고 느낀 대로 반응하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다. 단지 사회적 윤리와 개인적인 도덕심으로 발현을 감추고 억누를 뿐이다. 
사랑은 늘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아련한 추억이 되고 이룬 사랑은 무용담이 되며 버림받은 사랑은 증오와 미움을 남긴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 실낱같이 풀어헤쳐 놓으면 천 갈래 만 갈래의 삶과 감정의 교차점이 있다. 교차점 위에서 사람은 절망과 환희 그리고 삶이라는 진지함을 돌아본다.
사랑은 늘 아쉽다. 섹스를 끝난 뒤 찾아오는 뿌듯함보다 채워서 가슴이 비는 또 다른 공허감과 맞닥뜨린다. 70대 노인의 뒤틀린 사랑도, 40대 후의 농익은 사랑도, 십 대의 발랄한 사랑도 밑바닥은 다 사랑이다. 옳고 그름이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살갗의 온기에 몸을 부비며 그렇게 한순간을 보내도 좋은 계절이다. 그 순간만큼은 뜨거워서 몰입할 수 있고, 간절하기에 진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엽을 벗고 전라로 서 있는 나무의 고독도 있고, 흰 눈으로 덮여 치부도 감출 수도 있는 계절에  어딘가에  몸을  기대고  푸릇한  사랑의 이야기  읽어도  따뜻할  수 있는  겨울이다.

오창근 칼럼니스트
오창근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