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시대는 인공지능(Artficial Intelligence)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눈다고 한다. 인공지능은 사람인가?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사람의 모습은 어디까지 확장되는가?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라는 말도 있다. 인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고 계속적으로 외연의 확장이 이루어져 지금은 ‘전형적인 인간’으로부터 인공수정(체외수정)으로 태어난 사람, 로봇과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사이보그(Cyermetic Organism, Cyborg, 기술을 이용하여 능력을 개선한 유기체), 휴머노이드(Humanoid, 인간의 형태나 특징을 지니면서 인간이 아닌 실체), 로봇 등의 연결선상 경계면의 영역에서 인간인지 아닌지를 묻게 된다. 인간은 무엇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괴물의 이름을 짓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으로 불렀다. 프랑켄슈타인은 비유적으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 ‘자기가 만들어 낸 저주의 씨’ 등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젊은 스위스 학생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가진 인조인간을 만들어 냈지만 혐오스러운 외모에 저주하며 도망간다. 이 인조인간은 괴물이 되어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부당하면서 외로움의 고통을 느끼며 짝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짝을 만들지 말지를 고민하고, 전 인류를 위해 짝을 만들어 괴물이 더욱 번성하게 하면 안 된다고 고통 속에서 생각하게 된다. 괴물은 차례로 형제(‘윌리엄’), 친구(‘알리 클레르발’), 아내(엘리자베스)를 죽이면서 보복하게 된다.

글의 구성은 북극 탐험 이야기를 윌턴이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창조와 시련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괴물의 자기 이야기 등으로 이루어졌다. 
괴물의 이야기 속에서 괴물의 자아 정체성 형성 과정을 알 수 있고, 독서의 효과도 언급하였다.
프랑켄슈타인이  과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은 과학교사로서 시사받는  점이 있다. 

이를테면, “과거 과학의 대가들은 현실적으로 무익할지언정 장대한 꿈으로 불멸과 권력을 추구하였다면, 현대과학은 과학에 흥미를 갖게 만든 그 꿈들을 무너뜨리고 무한한 영화의 환각을 버리고 보잘 것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발트만 교수의 말에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처음에는 의무와 결단의 문제였는데 이제 는 열의와 열정으로 변화하여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아침 햇살에 별들이 사라지는 일도 흔하게 되었다.” -본문 중에서
그리고 철학 없는 과학 만능주의가 인간을 어디로 몰아갈지  생각해보게 된다.

괴물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이 괴물인가? 인간으로 태어나 괴물로 변할 수 있고 괴물로 태어나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지. 무관심은 뇌의 구조를 바꾼다고 한다. 어린이의 복잡한 신경망이 25세 때까지 가지치기 할 때, 우리들은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동 학대하고 방임하여 세상의 괴물로 키워가고 있지는 않은지. 과학기술의 다양한 발명품들은 우리들이 인공지능을 닮아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인공지능이 너무도 인간적이어서(김영하. ‘작별인사’, 2022.) 혐오할지, 관계 맺으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은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 모든 인간 속에 한 때 흑인, 여성, 어린이들이 제외되었다.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계속 외연을 넓히면, 모든 인간 속에 많은 존재들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인권< 동물권<생명권<자연권. 시대별로 그 긴 스펙트럼을 잘 나열하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 무지개가 될 것인지, 복제 인간이 펼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 펼쳐보아야겠다.

구윤모(산남중학교 교장)
구윤모(산남중학교 교장)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