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도로명 유래도 알고 상가도 알고 ⑥

청주지역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원흥이생태문화보전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두꺼비살리기 운동을 펼쳤다. 두꺼비 자연생태공원 조성을 위한 서명운동과 작은 음악회, 원흥이 자연학교, 가족 단위로 현수막 이어걸기, 원흥이 한마당 등을 열어 더 많은 시민들이 함께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택지개발을 앞둔 상황에서 두꺼비살리기 운동은 쉽지 않았다. 한국토지공사는 양서류 전문가에게 두꺼비보존대책수립 연구용역을 발주하였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은 두꺼비의 산란지인 원흥이방죽과 서식지인 구룡산을 연결하는 생태통로를 현재 한내들 아파트와 퀸덤 아파트 사이에 4m 폭의 콘크리트 수로로 만드는 안이었다. 이는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이었기에 두꺼비 살리기 운동은 2003년을 넘어 2004년까지 길게 이어지게 되었다.
2004년 원흥이 생명평화회의라는 더 큰 조직을 결성하면서 두꺼비 살리기 운동은 계속되었다. 성직자들의 무기한 단식, 활동가들의 삭발, 법원과 검찰청 앞에서 이전을 재고해 달라는 시민들의 릴레이 1인 시위와 60만배 절하기,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펼쳐졌던 삼보일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원흥이의 생명평화와 두꺼비들의 보존
을 위해 활동했다.
그리고 시민 700여 명이 새벽 6시에 원흥이 껴안기 행사에 나서면서 운동은 정점에 달했다.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이른 새벽에 시민들의 발길이 방죽으로 이어졌다. 둥근 생명지인 방죽을 지키기 위해 700여 시민이 손과 손을 맞잡았다. 하나 된 마음으로 모두가 외쳤다. “두꺼비를 살려주세요.”라고…….

사진8. 두꺼비 살리기 운동의 주요 활동들(2003년)
사진8. 두꺼비 살리기 운동의 주요 활동들(2003년)
사진9. 두꺼비 살리기 운동의 주요 활동들(2004년)
사진9. 두꺼비 살리기 운동의 주요 활동들(2004년)

시민들의 염원에 충청북도가 중재에 나섰지만 두꺼비 서식지 보전 문제는 쉽게 타결되지 않았다. 대안과 타협안이 제시되긴 했지만 절망적인 소식만 들려왔다. 이처럼 답보 상태에 머물던 운동에 희망을 안겨준 것은 맹꽁이였다. 멸종위기보호종인 맹꽁이의 출현은 두꺼비 서식지 보전에 새로운 물꼬를 터 주었다.

사진10. 원흥이방죽을 중심으로 설계된 두꺼비 생태공원 모습
사진10. 원흥이방죽을 중심으로 설계된 두꺼비 생태공원 모습

2년동안 지난했던 개발과 보전을 두고 벌어진 대립과 갈등은 11월 22일 ‘상생의 지역 개발을 위한 합의문’이 수용되면서 내용적으로 부족하고 아쉬웠지만 극적으로 타결되게 되었고 그래서 현재의 두꺼비 생태공원이 조성되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두꺼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생명평화를 갈망하던 물결은 이후 두꺼비 생태공원의 조성과 더불어 ‘두꺼비로’라는 도로명까지 생기게 되었기에 산남동은 두꺼비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사진11. 두꺼비가 이름으로 들어간 모임과 상호가 많은 산남동
사진11. 두꺼비가 이름으로 들어간 모임과 상호가 많은 산남동
신제인(생태교육연구소‘터) 소장
신제인(생태교육연구소‘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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