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게 살 수 있는 마을!’ 이 문구는 그 자체로 자구 모순이다. ‘외로움’과  ‘마을’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외로움으로 병들어가고 있다면 마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을이라 하면 전통적인 농업을 기반으로 한 시골을 떠올리지만 우리는 아파트마다 00마을 또는 **마을 등의 이름을 붙이기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런 아파트 단지가 마을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어쩌다 우리는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잃어버린 것일까? 그 결과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현대인들의 깊은 마음의 병을 앓게 되었다.
영국에서 외로움부 장관이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 중의 하나로 여겨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그러나 그 후로 외로움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게 우리 주변에서도 발견되었다. 급기야 일본에서도 외로움을 담당하는 부서와 장관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이제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문제를 그냥 개인의 성격 문제나 개인적인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외로움은 사회적인 문제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문제가 되었다.
기독교의 한 사회문제연구단체인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외로움은 현대인들의 경쟁의 결과로 나온 문제라고 한다. 타인은 나의 친구 혹은 동행할 사람이 아니라 경쟁상대로 생각해야 하니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결국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있게 되는 것이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 사회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현장이며 이러한 투쟁의 현장에서 서로의 안전을 위해 사회적 계약을 맺고 사회적 관계를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는 서구사회가 개인의 능력과 힘에 의해 양육강식의 사회가 되어 가는 현장을 분석한 것이다. 그의 이론이 현대에 얼마나 받아들여지는지를 떠나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의 사회가 되어 양육강식, 각자도생의 사회가 되어 모두가 외로움을 겪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위의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일반인들이 자신이 외롭다고 느끼는 비율은 60%를 넘고 심리학자들의 응답은 그것보다 훨씬 높아 78%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사회는 이러한 외로움의 투쟁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로움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유라고 한다. 대개 ‘만날 사람이 없다’(37%)라든가 ‘세상에 혼자있고 싶다’(31%)는 등 개인의 정서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통계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가 41%를 차지하고 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넘버즈] 35호) 통계는 이러한 사회의 근원에 대한 대답에서도 ‘한번 낙오하면 버텨내기 어려운 사회’라는 대답이 78%가 나왔다. 결국 우리가 외롭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낙오자에 대한 사회의 따뜻한 시선을 형성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외로움의 해결책에 대해서도 국가의 정책 대응과 봉사활동, 그리고 이타주의를 꼽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네인 산남동에서 외로운 사람들은 없을까? 외로움은 겉으로 쉽게 보이지 않으나 우리 주변에 사람들을 보면 찾아낼 수 있다. 노인, 어린이 청소년 등을 포함해서 장애인, 정신질환자들이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다면 그들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 약자들이다. 두꺼비마을은 산남동만이 아니라 구룡산을 둘러싸고 있는 수곡동, 성화동, 모충동, 미평동, 장암동, 사직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외롭지 않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외로운 사람들을 하나 하나 찾아내는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외로움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힘들다면 만나야 한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을 찾아 외로움을 해결하는 마을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이 관심이 외로움을 겪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들을 돕고 연결해 주는 구체적 노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동균 신부(대한성공회 청주산남교회)
오동균 신부(대한성공회 청주산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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