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한시적으로 요양시설도 대면 접촉을 허용한다는 요양원의 연락을 받았다. 회사가 바빠 집에도 올 수 없다는 남편을 앞세워 딸과 함께 수원에 있는 엄마의 요양원을 방문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서둘렀다. 첫 면회시간인 아침 9시 30 분을 맞추기 위해서는 7시 30분에는 나가야 해서 서두르게 된 것이다.

차로 가는 동안 마음이 착잡했다. 엄마는 얼마 전에 확진자가 되어 병원에 격리되었다가 요양원에 오시고부터 식사도 안 드시고 입도 안 벌리신다고 한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기에 전날 드실만한 간식거리를 준비하였다. 남편도 입을 꾹 다물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무인차처럼 그냥 갔다. 언니도 1시에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4명 예약을 잡았는데 언니도 같이 갈려면 우리 시간에 맞춰 서울서 내려오라고 하였다.

약속장소에는 언니가 먼저 도착하여 있었다. 우리는 준비해간 선물 보따리를 들고 요양원에 면회를 신청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엄마는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셨다. 그런데 엄마의 눈은 우리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씀도 안 하시고 눈은 멍한 상태로 휠체어에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 엄마, 우리가 왔다’ 고 아무리 말해도 엄마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엄마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해도 엄마는 그저 멍한 상태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나도 멍한 상태로 눈물을 흘리며 엄마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엄마에게 말을 시켜보지만 반응이 없다.

딸도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기억을 상기시키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반응이 없다. 나도, 남편도, 언니도 착잡한 심정으로 얼굴을 쳐다보지만 다들 아무 말을 못한다. 요양원 원장이 엄마를 향해 말을 시켜도 반응이 없다. 엄마는 이제 형체만 우리 엄마이고 정 신은 없다. 나의 눈물은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흐르고 다음 면회자가 있어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다행히 원장의 배려로 언니가 엄마가 드실 수 있게 갈아 온 음식을 점심시간에 드릴 수 있었다. 엄마의 점심식사를 언니와 동생에게 맡기고 나는 남편 때문에 그곳에 계속 있을 수 없어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왔다. 마음이 너무 착잡하여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에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드린 음식을 다 드셨다는 전화를 받고 한시름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이내 걱정이다.

‘사실 날이 얼마나 될까?’

답은 모른다. 늘 마음으로만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안타까움만 더해진다. ‘살아신제 섬기기를 다하라’ 는 옛 선인의 구절이 떠오른다. 나만 이런 상황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자식들이 겪어야 하는 현실이겠지만 면회가 되는 이 시기에 한 번이라도 면 회를 더 가려고 생각한다. 힘들더라도 나중에 후회하 지 말고 지금 부모님께 잘해보고자 다짐해 본다.

“엄마, 아직은 더 사세요.”  오늘도 엄마가 기운 차리시고 우리들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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