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국(본지 발행인겸 편집인)
‘학교 교(校)’자에 ‘나무 목(木)’자가 들어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 학교 교정에 ‘나무’를 심어야 하는가? 그 단서는 ‘학교(學校)’라는 단어를 거의 최초로 사용한 맹자(孟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맹자는 등문공(滕文公)과의 대화에서 학교를 설립해서 백성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서 ‘교(校)’란 ‘교(敎)’의 뜻이며, 그 종지는 ‘인륜을 밝히는 것(明人倫)’이라 설파하고 있다.<맹자 · 등문공 상(孟子 ·滕文公上)에서> 학교는 인간다움을 아는 인재를 배양하는 사회조직이며, 그런 사회조직으로서 학교의 이치는 ‘나무의 성정’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으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교(校)’자에 ‘나무 목(木)’자가 들어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 학교 교정에 ‘나무’를 심어야 하는가? 그 단서는 ‘학교(學校)’라는 단어를 거의 최초로 사용한 맹자(孟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맹자는 등문공(滕文公)과의 대화에서 학교를 설립해서 백성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서 ‘교(校)’란 ‘교(敎)’의 뜻이며, 그 종지는 ‘인륜을 밝히는 것(明人倫)’이라 설파하고 있다.<맹자 · 등문공 상(孟子 ·滕文公上)에서> 학교는 인간다움을 아는 인재를 배양하는 사회조직이며, 그런 사회조직으로서 학교의 이치는 ‘나무의 성정’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으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를 교육적인 상상력과 호기심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로 인식한 것은 맹자만이 아니다. 헤르만 헤세는 유년시절 나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무는 성소(聖所)이다. 나무와 이야기하고 그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진리를 배운다. 나무는 교의나 규율을 말하지 않고 개별적인 것을 넘어 삶의 근본 법칙을 들려준다.”(헤르만 헤세 <나무들> 중에서) 헤세의 문학적인 감수성이 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을 통해 길어진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교정(校庭)에서 나무들을 보면서 나무들의 기운과 함께 인간다움을 기르고 내적 감수성을 고양시켜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교정엔 나무가 부족하다. 3년여 밖에 안 된 신설학교라 위안을 삼다가도 나무들을 심어야 할 자리에 화학적인 가공물인 ‘우레탄’이나 ‘인조잔디’를 깐다는 소식을 접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 마을을 차치하고서라도 충북도내의 국공립 초등학교 158개교의 43%에 이르는 68개소가 인조잔디 운동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니 착잡한 심정 금할 길 없다. 수백억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학교운동장 갖기 사업이 ‘인조잔디’에 ‘우레탄’ 운동장으로 획일화될 필요가 있을까? 그 사업으로 학교 교정에 나무 심기, 꽃밭 가꾸기, 복토 및 배수시설 같은 자연친화적인 사업은 애초 불가능한 일인가? 그 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흙(마사토)운동장도 ‘우레탄 트랙’에 ‘인조잔디’라는 과학기술의 미명으로 치장된 비인간적이면서도 반자연적인 운동장으로 대체되고 있으니 이 어찌된 조화인가? 어른들은 왜 촉각적 · 청각적 · 후각적인 진실을 외면한 ‘가짜’ 잔디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통탄스럽다!

우리 마을의 한 초등학교에는 나무 대신 주철로 만든 그늘막이 몇 개 덩그렇게 서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나무는 그늘만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령스러움이자 영감의 원천이며 삶의 용기를 주는 성소이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우거진 교정에서 아이들이 뛰놀다가 지금 보다 밝고 광활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정녕 헛된 꿈일까? 그렇게 된다면 학교와 그 학교가 있는 마을 전체에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무들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자연친화적인 초등학교 교정이 우리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조현국(본지 발행인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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