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미(산남대원칸타빌2단지, 45세) 구급대원•소방노조 정책국장 1기 •충북소방노조 부지부장 1기•구급대원 경력 21년차
고은미(산남대원칸타빌2단지, 45세) 구급대원•소방노조 정책국장 1기 •충북소방노조 부지부장 1기•구급대원 경력 21년차

 

며칠 전 뉴스에서 코로나에 확진된 산모가 구급차 안에서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연인 즉, 격리중이던 산모가 출산에 임박해 병상 배정을 신청했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배정받지 못하고 결국 구급차 안에서 분만을 한 것이다. 병원을 구하지 못해 마음 졸이며 출산했을 산모를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그날 구급차 안의 모습은 얼마나 긴박했을까?  방호복을 입은 구급대원이 병원을 물색하며 기다리다 결국 구급차 안에서 아이를 낳는 모습이 그려졌다. 구급대원의 응급처치가 없었다면 산모와 아이가 어떻게 됐을지 아찔했다. 기자는 충북에서 구급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은미씨를 만나 인터 뷰를 하였다. 올해로 경력 21년 차에 접어든 동네 주민이기도 한 그녀를 통해 대한민국 구급대원의 삶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인터뷰 내용은 그녀의 시점으로 재구성 하였다.)


구급대원으로서의 시작


처음 시작은 초등학생때로 거슬러 올라 간다. 학생때부터 왈가닥 괴짜스타일이지만 달리 말하면 사람 좋아하고 활동적인 아이였다. 그런 나를 은사님이셨던 유황영선생님이 알아봐 주시고 “너는 경찰이 어울리겠다”고 말씀하신 이후 경찰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다 고3이 되어 수능을 보았지만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 경찰학과 대신 교통대 응급구조학과로 진학을 하였다. 소방관도 경찰만큼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2001년에 처음으로 소방구급분야 특별 채용이 있었다. 전문교육을 받고 전문학과 학위를 받아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응급구조사로서는 처음 있는 채용공고였다. 그해 7월 6일에 임용, 정식 소방공무 원이 되어 현장활동을 시작했다. 구급대원으로서의 현장 일은 고됐지만 힘든 일을 서로 돕고 나누는 공동체적 분위기가 좋아 즐겁게 해올 수 있었다.


부부소방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부부 소방관은 거의 없었다. 고된 일이기에 여성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안성소방서 근무시절 회식자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처음엔 시골사람의 투박함이 맘에 안들었다. 하지만 볼수록 순수하고 착한 마음에 이끌려 부부소방관이 되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부터 고된 응급구조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부장적인 남편이 도와주지 않아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서운한 마음이 남는다. 그때 나의 구세주는 친정 엄마였다. 지금도 아이를 키우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데는 엄마의 공이 크다. 육아의 과정이 너무 힘들었지만 잘 지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엄마. 엄마라는 존재만으로 벌써 마음이 꽉 차는 기분이다. 이후 남편은 25년째 소방관으로 살며 평택, 안성으로 출퇴근하는 삶을 산다. 퇴근길에 천안에 계신 시부모님을 챙기기 위해 자처한 일이다. 소방 일 하면서큰 사고 없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주어 참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결혼 18주년 기념 가족사진 남편 양용주님(50세), 큰딸 양승아님(17), 작은딸 양나윤님(15)
                 결혼 18주년 기념 가족사진 남편 양용주님(50세), 큰딸 양승아님(17), 작은딸 양나윤님(15)

 


트라우마


사실 구급대원들은 현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현장에 나가보면 칼을 들고 자해를 하거나 구급대원을 공격하기도 한다. 스스로 배를 찔러 탈장이 된 사람, 교통사고로 온몸이 절단된 사람, 긴급하게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결국 고인이 된 환자의 살려달라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을 때도 있다.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면 평생 한번 볼까 말까 한 현장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으며 생명을 구하거나 수습한다. 그것이 응급구조사의 운명이다. 험한 꿈을 꾸거나 잠 못 이루는 날들도 많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현장을 보기도 전에 두려움이 먼저 온다.


이런 일만 있다면 견디기 어렵겠지만 보람도 크기 때문에 버틴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응급환자가 새 삶을 얻게 되었을 때, 후유증이 클 수 있는 뇌혈관 질환자들을 적절히 응급처치해서 퇴원 후 잘 생활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새삶을 살게 해주어 고맙다고 찾아오시는 분들을 뵐 때 참 뿌듯하다. 기왕 일을 함에 있어 남을 위하는 일을 한다는 게 보람 있다. 또 쉬는 날 자연을 보며 좋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힐링하는 것으로 긴장을 날리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힘든 일이기에 내 아이가 소방 일을 한다면 말리고 싶었는데, 결국 고등학생이 된 큰 아이가 응급구조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지금은 아이의 꿈을 인정 하고 받아들인다. 전문지식을 갖춘 구급 대원이 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지혜로운 구급대원이 되라고 말해주고 싶다.


코로나시대의 구급활동


구급대원은 응급환자를 적절한 병원에 최대한 빨리 이송을 하고, 도중에 적절한 응급처치를 해주는 것이 주된 임무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응급환자의 병원 처치가 늦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보호복을 갖춰 입고 현장 출동을 하다 보니 시간과 힘이 배로 드는 데다가, 확진자 이송으로 출동이 늘어 현장인력이 많이 부족하다.


병원 선별에 있어서도 확진자가 늘어 수용을 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전문의와 병상부족, 의료진의 피로누적으로 현장에서 어려움이 많다. 가까운 병원을 찾지 못해 타 시도로 이송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고, 병원 앞에서 네다섯 시간씩 대기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면 응급환자의 골든타임이 무너지게 된다. 그시간 동안 응급환자와 구급대원은 지옥이다. 병원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구급차 안에서 환자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을 온전히 지켜봐야 하는 일이 괴롭다.


현장에서는 영웅, 조직내에서는 하대


2019년 4월 4일에 강원지역에 대형 산불이 났다. 강풍에 고성에서 속초시내까지 속수무책으로 번져 국가재난 사태가 선포되었다. 전국의 모든 소방차에 출동 지시가 내려졌고 전국 각지의 소방대원들이 강원도로 향했다. 휴게소에서 끼니를 때우는, 연기에 검게 그을린 소방관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4월 1일에 소방공무원이 지방직에서 국가직으로 전환이 된다. 이후 소방 장비 보급이 좋아지고 행정인력이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현장에 효과 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현장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예산권과 인사권이 지자체에 있어 재정이 좋지 않은 시도는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최일선에서 고생 하는 노동자에 대한 평가와 인사가 내근 행정직에 비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점이다. 국민들이 바라보는 소방관은 현장에서는 영웅이지만 조직에서는 하대 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런 연유로 현장근로자에 대한 처우 개선을 위해 임용 20년이 되는 올해 7월 6일에 소방노조 1기 정책국장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소방노조가 없었으나 ILO(국제노동기구)의 권고사항으로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소방노조가 정식 출범했다. 처음 정책국장을 제안 받고 윗사람들에게 가시 같은 존재가 될까 봐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노조라는 창구를 통해 소통하고 현장의 목소리를낼 수 있어 만족한다.


내 가족처럼 생각해주세요

구급 일을 하며 만성 허리디스크와 좌골신경통을 얻었다. 출동 중 발등이 골절 되는 일도 겪었다. 가끔 현장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기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사는거 아니냐며 함부로 말하는 주취자들을 상대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현장이 재밌고 구급대원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구급대원을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대해주면 힘이 날 것 같다.


기자의 한마디
평소 가까이 지내던 고은미씨를 인터뷰 하며 그녀의 삶의 여정을 진솔하게 적어 보았다. 트라우마를 이겨 가며 최선을 다해 응급구조 활동을 해나가는 대한민국의 모든 구급대원들과 소방관들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당신들이 있어 오늘도 안심하고 살아갑니다. 참 고맙습니다.”

                           박선주 마을기자
                           박선주 마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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