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인문학을 읽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만남을 통해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삶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방식의 생활에 급격하고 거센 제동이 걸렸다. 근대사회의 도시화된 삶에 대한 분석 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더 넓은 관계 망으로 이어져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은 비즈니스이기도 하면서 삶의 문화적 측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 살고 있는 친구들의 관계를 기반으로한 우정의 네트워크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며 거기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게 된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이러한 기본적 관계망을 제한하는 삶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편안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누리는 소소한 일 상의 행복을 더 이상 마음껏 누리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더우울해 진다. 2년의 코로나 시기를 거치 면서 사회적인 자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고립된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고립감 으로 인한 정신적 장애를 겪게 된다.


고립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더욱 중요해진 문제는 우정이라는 주제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정의 실체는 무엇이 었는지를 성찰하고 고립된 사회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정의 문화, 우정의 가치를 더 깊게 고민하고 사유해 보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우정이란 자유인들이 서로의 교양을 나눌 친구를 필요로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상대방을 친구(필리아)라고 불렀다. 그 상대가 젊은 이이건 나이든 사람이건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자유로운 토론의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 크라테스 주변의 인물들이 나누는 우정은 자유로운 의견의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대들로서의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덕목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지혜(소피아)를 함께 누릴 상대로서의 친구(필리아)들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나눌 친구의 우정이 철학(필로소피아)을 만들어가는 주체들인 것이다. 동양에서의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이야기 에서 잘 드러난다. “나를 낳아주신 것은 어버이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 (친구)이었다.” 우정은 그 사람을 인정해 주고 받아주며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이 한 실험에 의하면 우정이 생겨나려면 근접성(procimity), 유사성(similarity), 상호성(reciprocity) 이 중요하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세계화가 진행되는 속도가 가속화되어 ‘평평해진’ 세계에서 근접성, 유사성, 상호성은 인간이 상품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과 사회의 경계를 허물어 코로나 19라는 변이바이러스가 생겨나고 인간을 공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과적 으로 우리는 그 접촉에 제한되고 격리와 고립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삶에서 우정이 가진 가치에 대해 성찰해보아야 한다. 상품화된 인간관계가 주는 속도와 근접성을 제약 받은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화된 보편적 사랑으로서의 우정을 되찾을 것인가 라는 주제가 바로 그 성찰의 핵심질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고립은 가치로서의 우정을 되살리고 소중하게 회복하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우정을 통해 고립이 강요된 사회에서 인간성의 가치적 연결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고립으로 인해 발생하는 외로움과 우울, 그리고 정신적 질병들로부터 치유받을 수 있는 길을 우리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동균 신부
                          오동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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