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동 법원 앞에서 20년째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80세의 법무사가 있다. 그는 30년 동안 법원에서 근무하다가 이후 10년간 집행관으로 근무, 현재는 20년째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칼국수를 대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꾸준히 기부를 이어 오고 있는 그, 바로 최천수 법무사다. 2시간 넘게 최천수 법무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끝이 없었다. 하긴 80년의 인생역정을 어찌 두 세시간에 담을 수 있을까. 그래도 최대한 최천수 법무사와 나눈 이야기를 그의 시점으로 재구성해본다.

최천수 법무사가 부친의 생전 육군사관학교 시절 사진을 들고 있다. ⓒ조현국


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지독한 가난속에서 성장
  어린 시절 아버지(고 최만식)를 6.25 전쟁으로 잃었다. 그때 나이 10살,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고 윤계순) 는 홀로 1남 1녀를 키우기 위해 고된 일을 했다. 재봉일을 하며 온갖 고생을 했지만 세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고구마 한 개로 끼니를 때우거나 조당수를 먹었다. 조당수는 쌀 대신 조로 만든 죽을 말하는데 이걸 후루룩 마시면 배도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아무리 맛있다 해도 죽은 절대 먹지 않는다. 그렇게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다 군대를 가니 매끼니 밥이 나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리 귀한 밥을 주는데도 탈영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강했다면 노력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 것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빵을 꺼내 먹었던 기억이 있다. 빵은 당시 귀한 음식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마 이렇듯 계속 호강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 덕을 봤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됐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귀한 것을 쉽게 얻는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아버지가 계셔서 호강했다면 소중함을 모르고 건달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내 내면의 세계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제7회 육군사관학교 졸업 앨범 원본과 제본. ​ⓒ조현국​
제7회 육군사관학교 졸업 앨범 원본과 제본. ​ⓒ조현국​

 

죽을 먹을지언정 손님에겐 밥을 대접해라
  어머니는 항상 우리는 죽을 먹어도 손님에게는 밥을 대접하셨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늘 베풀며 사셨다. 그런 연유로 1983년도에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때 받은 상품을 봉고차로 싣고 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당시 받은 상금 100만원 또한 동네 어르신들을 위해 가로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동네 어귀에 어머니의 비석이 세워졌다. 평생 동안 이어져 온 어머니의 선행은 내게 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는 귀한 가르침이 되었다.


칼국수를 사고 싶어 일을 그만 두지 못한다
  IMF 시절 집행관을 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파산을 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런 시절에 돈을 잘 버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번 돈을 사회에 되돌려 주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나 수재 의연금 등에 기부를 하고 있다. 지금도 IMF시절 못지않게 경제적으로 어려워 주변 사무실이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할 수 있어 참 감사하다. 번 돈으로 사람들에게 칼국수를 살 수 있으니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칼국수를 사고 싶어 그만두지 못한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하여 칼국수 대접과 기부를 이어갈 생각이다.

최천수 법무사(좌)가 생전 부친의 추억이 있는 제7회 육군사관학교 앨범을 취재기자와 함께 들고 있다. ⓒ조현국
최천수 법무사(좌)가 생전 부친의 추억이 있는 제7회 육군사관학교 앨범을 취재기자와 함께 들고 있다. ⓒ조현국
법무사 사무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감사패 진열장. ⓒ조현국
법무사 사무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감사패 진열장. ⓒ조현국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 기부
  매주 토요일 동창들과 등산모임을 한다. 그 모임 회원 중에 노장우(현 산남동 바르게살기위원회위원장)라는 친구로 부터 아파트에 태극기 달기 운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자는 좋은 취지의 운동에 동참하고자 태극기 기금을 기부하였다. 나라를 지키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게는 광복이나 태극기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경험한 지독한 가난이 오히려 내게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그런 의미로 칼국수 한 그릇이 내게는 갈비만큼이나 귀하다.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칼국수를 나누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며 사는 삶, 그것이 여전히 내 삶의 행복한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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