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7년 전 이야기다.
젊은 사람들은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1954년, 우리나라는 한참 전쟁 중이어서 아군은 UN군과 합동작전을 펼쳤고 이북은 중공군이 합세하여 전선은 치열한 전투로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했고 수많은 젊은이가 죽어 나갔다. 그 당시는 통신시설도 전무한 상태로 라디오도 면장집에 한 대밖에 없었고 전화는 우체국과 면사무소에만 있었다. 그러니 일반 주민은 전황을 알 길이 없었고 뜬 소문만 난무했다.

  정부도 전쟁 체제여서 모든 것이 전쟁에 집중하였음은 물론이다. 젊은이가 입영 명령을 받고 가는 날이면 학교는 수업을 중단하고 태극기 들고 기차역으로 나가 면민들과 만세 부르며 입영 장병의 무운장구를 빌었다. 입영 장병들은 단기 교육 수료 후 바로 최전방 전투부대에 편입되었는데 그 당시는 입영 장병의 대부분이 한글도 모르는 문맹이라 단기 교육이 전투에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멀쩡한 소총에 탄창도 못 끼우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부락에서는 한달 전 입영한 장병의 전사 통지서를 받는 일도 있었고 행방불명의 통보를 받아 통곡하는 모습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 시절 정부에서는 각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창설, 현역 군인을 파견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우리학교에도 작은 부상으로 전투 수행에 불편한 육군 대위가 부임했는데 모든 학사 일정은 그 교관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전교생이 헌 군복을 갈색으로 염색한 훈련복을 입어야 했고, 나무로 만든 목총·물 통·각반(신발과 신발 사이를 감는 도구)를 갖추어야 했고 내가 다닌 농업고등학교의 농기구 창고는 무기고로 변신하여 목총과 모의 수류탄이 보관되었다. 훈련이 있는 날은 훈련복을 입고 등교했으며 제식 훈련을 기본으로 정신교육, 총검술, 각개 전투태세 등의 훈련을 받았다.

  장거리 행군이 있는 날은 전교생이 참석, 새벽에 출발 저녁에 도착하는 강행군이었는데 행군 중 계속 군가를 불렀고 교관의 명령에 따라 구보, 전투태세 배치, 포복 등이 이어졌으며 싸간 도시락을 먹고 바로 또 행군…… 그래서 80리 길을 행군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었는데 전선은 여전했고 군사 정전위에도 휴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각 학교에서는 사흘 도리로 ‘휴전 반대’ 데모를 했다. 쉽게 말하면 관제 데모였다. 학교에 가면 수업은 안 하고 학생들이 현수막을 직접 그렸는데 지금 같은 물감은 없었고 옷에 염색하는 물감으로 그렸다.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한 이야기지만 그땐 힘든지 몰랐다. 그해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전선엔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금 휴전선이 그때 만들어진 남북 간의 경계선이 되었다.

▲ 피원기 명예기자 (산남부영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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