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전 이야기다.
6·25 사변 때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라디오방송에서 ‘휴가 중인 군인들은 즉시 귀대하라’는 방송만 들었는데, 한강 다리는 폭파되고 피난을 가지 못한 채 북한 군인에게 서울이 점령되었다.
전세는 밀리고 밀려 대구 낙동강 전선까지 갔다가 UN군의 가세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등 전세가 승전 분위기로 바뀌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 바로 통일되는 줄 알았다. 그때 중공군이 인해 전술로 물밀 듯이 내려와 전세가 역전되었다.
‘1·4 후퇴’ 전세가 엎치락뒤치락, 서울시민들도 잠시 피난을 가야 한다 했고 우리집도 서울에 살던 이모들 세 가족과 외할머니가 계신 황간으로 가기로 하고 17명의 일행이 마포나루에서 야밤에 비싼 나룻배로 도강했다. 피난 보따리라야 잠시 전쟁터를 피하는 것이어서 겨울옷 몇 가지와 패물이 전부였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교과서와 공책 연필만 챙겼다.
피난민 군중에 밀리며 영등포역까지 왔다. 그 당시엔 제일 빠른 것이 경부선을 이용한 기차였다. 포장되지 않은 국도는 있었으나 군용 트럭만 다닐 뿐 피난민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경부선도 전시엔 군사 전용이어서 하행선은 파손된 군수물자 수송이었고 북쪽으로 가는 열차는 군수품과 군인 수송이 전부였다. 지금처럼 정기 열차나 수송용 열차는 없었다.
우리 일행도 기차 위에 실려진 고장난 탱크 구석에 겨우 올라탈 수 있었다. 이 기차는 부산으로 가서 군수품을 싣고 북행해야 되는데, 더 급한 것이 북송용 기관차이어서 피난 열차는 아무 역에다 내려놓고 기관차와 운전사는 북행 열차를 끌고 전선으로 갔다. 그래서 용산역에서 출발한 피난 열차는 황간까지 가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그때에도 춥고 배고프지만 음식을 파는 곳도 없었고 기차가 언제 갈지 모르니 멀리 가서 음식을 구할 수도 없었으니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조금 챙긴 패물도 몇 덩이 주먹밥으로 바꿔 먹었다.
막상 황간에 도착했으나 우리 일행 17명이 한 집에서 살 수는 없었고 생계 수단이 없으니 살 길이 막연했다. 피난민들에게는 가뭄에 콩 나듯이 구호물자가 배급되기도 하고 군용인 레이션상자(군용 비상식량)나 우유, 헌 옷 등도 배급받을 때도 있었다. 주로 먹고사는 방법은 피난 보따리가 전 재산이어서 하나씩 패물이나 옷가지 등을 팔아서 연명했다.
그 사이 동네 아이들과도 사귀어서 같이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다. 전세가 안정되어가자 초등학교가 수업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같은 피난민은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지금처럼 재학 증명을 서울까지 가서 떼어 올 수도 없는 형편…. 친구 따라 학교까지는 갔었는데 선생님이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래서 피난민이라고 했다. 나 말고도 피난 민이 몇 명 더 있었다. 몇 명의 피난민들은 그곳 학생들과 섞여 두 달 정도를 학교에 다녔는데 졸업식을 한다는 것이다. 피난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피난민들에게 정식 졸업장은 줄 수 없고 ‘졸업인증서’란 것을 주었다.
이 졸업인증서로 피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