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 생가에 가면 시인의 시들이 돌에 새겨 있다.
▲ 윤동주생가에 있는 시인의 동상 옆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소낙비를 맞으며, 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에서 걸어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했다. “시는 왜쓰는 것인가?” 이 질문은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궁금증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윤동주의 존재 의미를 고민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시는 왜 쓰는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쉽게 씌어진 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여진 시>에서 윤동 주는 시를 ‘참회와 위안’으로 표현했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이라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참회하고, 반성했던 윤동주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비쳐오는 것만 같았다. 윤동주는 그런 내 모습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위안과 함께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려고 노력하 였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이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또한, 나는 지금 나의 모습을 보며 이 시를 내 마음에 또 하나의 참회로 삼았다.
또 다른 시인의 시인 <참회록>에서도 이렇게 윤동주는 이렇게 말한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이 시에서도 윤동주는 자신이 이십사년 일개월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참회의 글을한 줄로 줄여야 하는 시인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물론 2019년의 내가 윤동주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윤동주의 시를 보면 윤동주는 시를 ‘참회와 위안’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
시의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이는 행복을 위해, 어떤 이는 위안을 위해 시(詩)를 찾아 온다. 그 중에서도 윤동주는 시의 이유를 ‘참 회와 위안’ 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어떤 이는 공감하고, 어떤 이는 공감하지 못 하겠 지만 적어도 시의 이유 중에 ‘참회와 위안’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일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시의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시의 이유를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윤동주 생가를 다녀온 후 감상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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