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를 읽고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이 있다면 점점 편한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 이다. 어렸을 때는 내가 갖지 못한 미지의 것이 좋았고, 사회 초년생일 때는 날카로움이 좋았다. 세월은 모든 것에 무뎌지게 하는지 점점 평범한 것에 이끌리고, 그냥 보통인 것에서 특별함이 보인다.
사람들의 말과 글도 그런 것 같다. 작가는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준다고 말한다. 슬픔을 감싸 안고, 고민을 털어내고, 위안을 얻기도 하는 것은 특별하고 값비싼 그 어떤 것도 아닌 우리의 말과 글이다. 특별하다고 의식하지 못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누군가에게는 절망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언어에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발견한 말과 글로 언어가 지닌 소중함과 절실함을 책에 담았다고 말하는데 정말 이 책에 딱 맞는 소개 글이다.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언어는 위로의 말이다. 특히나 이제 막 알아가고 있는 사람의 슬픔을 목격했을 때는 정말 난감하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무슨 일이야? 말해봐.”, “정말 힘들겠다.”, “어쩌면 좋니?” 하는 일반적인 위로의 말들이 너무나 이질감 있게 느껴져 어색한 웃음을 짓고 시선을 돌리기 일쑤다. 유난히 위로의 말에 약하 다보니 나 스스로 그런 자리를 피해보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작가는 이 책에서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라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고 말이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 그거였구나. 나는 이제 막 알아가고 있는 사람의 슬픔을 이해 못한 게 아니라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해야 된다는 생각에 그 상황이 어색했던 거였다. 나에겐 헤아림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거다.

아이들을 여럿 키우다보니 질문 공세를 받을 때가 많다. 가급적 대답을 해주려고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응,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원래 그런 거야.”라는 대답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발판에 아이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

<원래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질문만으로 현실의 문제를 일시에 해소할 수는 없다.
다만 질문은 답을 구하는 시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 다. 정말 좋은 질문은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첫번째 발판인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낙원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낙원에 도달하려면 일단 떠나야 한다. 어떻게? 호기심이라는 배에 올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수밖에.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개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언어의 온도』 본문 중에서-


나는 주부로 살면서, 엄마로 살면서, 학부모로 살면서, 봉사자로 살면서 늘 프로처럼 되고자 노력했다. 작가는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를 구분하는 게 먼저라고 말해준다. 프로가 되려는 노력은 그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며 말이다. 프로처럼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아마추어처럼 하면 욕을 먹기 쉽고, 아마추어처럼 즐겨야 하는 일에 프로처럼 목숨을 걸다가는 정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다는 조언을 해준다. 지금 내 상황에 얼마나 필요한 조언인지 사막을 걷다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아마추어처럼 즐기며 살 건지, 어떤 부분을 프로처럼 달려들 건지 구분하는 시간이 절실한 요즘이다.
한때 기술을 얻는 도서에 빠져 지낼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많은 새로운 정보들에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왔다. 작가는 ‘앎’은 퇴적과 침식을 동시에 당한다고 말한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식이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단다. 공부는 끝이 없다는 뻔한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 는 경우도 많다며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특히 그렇다고 말한다. 그래,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얼마 전에 장롱 속 깊은 곳에서 필름카메라를 발견했 다. 일곱 번을 이사 다니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그날 내 눈에 띄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아빠가 우리를 찍어주었던 골동품 카메라이다.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나니 녹아버린 건전지 탓에 고장 난 플래시만 빼고 작동이 가능해 보였다. 인터넷으로 필름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나의 어린 시절이 느껴졌다.
대청마루의 서늘함과 뒷담 너머로 가지가 무성한 밤나 무, 방안에 피웠던 난로인지 화로인지 모를 따뜻한 온기, 물주전자, 마당에서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멍멍 이, 쪽쪽 빨아먹던 달콤한 사루비아 꽃, 아빠의 오토바이 소리, 기억하고 있는 게 과연 맞기는 할까 알 수 없는 흐릿함 속에 옛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축축한 담벼락 이끼 냄새, 밤나무 냄새, 멍멍이의 숨소리, 대청마루의 시원한 느낌으로 이 모든 장면들이 마치 퍼즐처럼 맞춰졌다. 제대로 찍히기는 할지 의문투성이인 필름카메라 하나로 나는 ‘한때 곁에 머문 것’을 찾아 행복했다.

 

<당신의 추억을 찾아드린 날>
우린 새로운 걸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간 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무작정 부여 잡기 위해 애쓸 때보다 ‘한때 곁에 머문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것을 되찾을 때 우린 더 큰 보람을 느끼고 더오랜 기간 삶의 풍요를 만끽한다. 인생의 목적을 다시금 확인한다.
-『언어의 온도』 본문 중에서-


『언어의 온도』는 독자들이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기자 출신 작가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부드 러운 문장으로 일상적인 경험과 따뜻한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평범하고 단순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책이다. 작가가 강조한 ‘글은 쉬워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제법 서늘해진 이 새벽, 아직 잠들지 못한 누군가 있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류혜영(산남푸르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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