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 속에서 누구나 비유를 발견합니다. 구름을 바라보며 양을 떠올린다든지 능선을 바라보며 얼굴이나 인체의 윤곽을 떠올린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유사성으로 인해 발현되는 상상력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깐 그렇게 떠올렸다가 무심히 지나갑니다. 그런데 어떤 시인들은 거기 집중합니다. 그걸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생각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단순한 유사성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 내지요. 오늘은 그런 쪽에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는 한 시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시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유 홍 준


이 아스팔트 밑에 거북이 산다

분명하다 갑골의 등짝처럼 딱딱한 이 길바닥이

저렇게 쩍쩍 금이 간 것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공사 탓이

아니다 짧고 뭉툭한 발목에 질끈 힘을 주고

끙차, 아스팔트 속의 거북이 등짝을 밀어올렸기 때문

 


확실하다 초과적재한 저 화물차의 중량 탓이

아니다 저 균열, 거북의 등을 보라

이 비루먹은 길들을 다 갈아엎을 심산으로

해안이 가까운 남해나 거제

해남이나 진도의 캄캄한 밤에

아스팔트 속으로 제 대가리를 밀어넣었을 거북!

이 망할놈의 나라 도로 곳곳을

오늘도 롤러를 단 공사용 차량이 다진다

갈라 터진 길바닥에 새 아스콘을 붓고 다진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압사를 당한다

                            『나는, 웃는다』(창비, 2006) 중에서

 

 

<읽기>
 시인이 길을 가다가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거북이 등짝을 닮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가 개발 논리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해안도로가에 희생되었을 거북이들이 떠오른 겁니다. 알을 낳기 위해 올라오던 길을 도로공사로 인해 끊어버렸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죠. 그렇게 되자 그 거북이 등짝 모양의 균열은 단순히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진짜로 거북이 등짝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진정성을 가지게 된 것이죠.
 그 균열은 단순히 도로 공사가 부실해서라거나 적재정량을 초과한 차량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거북이들이 그 검은 도로를 두 발로 앙버티고 들어올려서 그렇게된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이런 상상의 전개는 일종의 유희와 같지만 그 속에 진실을 내재한 것이지요. 자연과 인공의 대립에서 승자는 언제나 자연일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말을 이미지로 아주 강렬하고도 함축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는 타성을 깨고 충격을 주는 방식의 말입니다. 새로운 방식의 말이지요.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언제나 본성을 향합니 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갇히게 된 허위를 찢어버리고, 날 것으로서의 세계를, 우리의 본성과 본질을 일러주는 방식의 그런 새로움 말입니다.

▲ 시인 정학명(가람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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