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이작 뉴턴은 ‘거인의 어깨’에 대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뉴턴은 자신과 라이벌 관계였던 물리학자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남보다 잘 보고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섰던 덕분”이라고 썼다. 뉴턴 또한 거인임이 분명한데 ‘거인의 어깨에 올라섰다’는 것은 그의 과학적 성과가 자신의 힘만으로 가능할 수 없었다는 겸손의 표현일 것이다. 얼마 전엔 어느 종편채널에서 ‘거인의 어깨’라는 제목의 프로그램도 만들어졌을 정도니 뉴턴의 언급 덕분에 사람들에게 꽤 나 알려진 표현이다.
  어찌 뉴턴뿐이겠는가. 나에게도 잊지 못할 거인이 있다. 몇 해 전, 난생 처음 중학교 2학년 남학생들의 담임을 맡게 되었던 나는 그동안 해왔던 방법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무능감과 무력감을 맛보아야 했다. 매일 매순간 교사로서의 삶이 좌절스러운 시간들이 이어졌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심정이었던 날들 속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교무실에서 우리 반 아이가 핸드폰을 제출하라는 말에 욕설을 퍼붓고 분을 참지 못한 채 복도의 유리창을 손으로 쳐서 깨고 뛰쳐나간 것이다. 선생님과 아이들로 시장통처럼 북적이던 교무실에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다음날, 나는 선뜻 출근길에 나설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 얼굴을 어떻게 보나? 무능한 담임이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우리 반 아이들은 뭐라고 할까? 평소처럼 재잘재잘 물어보면 어떻게 답해야 하나?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질질 끌다시피 출근을 했다. 그런데 학교에 출근한 나에게 아무도 전날의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말이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며칠이 흐른 어느 날, 교무실에 옆자리 선생님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를 힐끗 쳐다보시더니 지나가는 듯 무심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추선생님,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
  흠칫 놀라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의 눈에서 나도 모르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나를 쳐다보던 선생님도 울음을 터뜨렸고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울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내 마음속에 가득했던 분노와 좌절, 미움과 원망이 느껴졌다. 반창고로 덮어두었던 상처가 아물 때처럼 마음 속살이 근질거리며 쓰라렸다. 바라보는 눈만으로 나를 위로하는 동료 선생님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볼 용기가 생겼다. 그 날 말없이 우는 나를 바라봐 준 선생님은 나에게 분명 거인이었다. 내가 더 멀리, 더 깊게 볼 수 있도록 기꺼이 위로의 어깨를 내어준 거인이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내 곁에 늘 함께하는 거인들의 따뜻한 시선에 마음이 그득하다.

▲ 추주연(충북단재교육연수원, 산남퀸덤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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