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구름

고백하건대 저는 오랫동안 최승호에게 빠져 있었습니다. 이십대에서 삼십 대를 지나는 동안 저는 이 시인을 읽고또 읽었습니다. 회색빛 세계관이라 명명할 수 있는 그의 시세계는 당시 불교에 어느 정도 경도되어 있던 제게 아주 매력 넘치는 세계였습니다. 얼마나 읽었는지 나중에는 제가 쓰는 문장들이 최승호의 문장을 닮아 있었습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사유의 전개 방식이 또한 최승호를 닮아 있었습니 다. 무엇엔가 빠진다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통째로 바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행복하며 자발적인 복속이지만, 새로운 자신의 경지를 열어가야 할 작가에 게는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느 날 그런 문장들을 버리고 그로부터 떠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저의 우상이며 단 한 번도 뵌 적 없는 마음 속의 스승입니다. 오늘은 그의 세계관이 아름답게 표현된 시 뭉게구름을 읽어 보겠습니다.

 

뭉게구름   최 승 호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 2003)

 

<읽기>
이 시는 구름의 시입니다. 구름이라는 상징을 탐구한 시지요. 우리는 삶을 한 자락 뜬 구름으로 비유한 문장들을 익히 보아 왔습니다. 수행을 위해 떠도는 승려들을 운수납자라 부르기도 하지요. 구름이나 물처럼 흘러 다니는 고정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명명입니다. 물질로써 우리는 여기에 머물다 갑니다. 순환하는 어느 지점으로써 현재는, 생은 여기를 지나갑니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이미지와 상징들의 절묘한 운용에 있습니다. 나의 가계는 나의 역사이며 내 존재의 근간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구름족이라 부를 만한 것이기도 합니다. 구름 아래 방황하던 할아버지며, 구름 속으로 사라져간 할머 니, 그리고 먹구름이라 불리는 고통스런 근심의 세계로써의 현재를 살아내는 어머니는 모두 구름족이지요. 그리고 나는 그들의 후손입니다.
흰 머리카락과 들국화 위에 내리는 서리는 구름의 변주입 니다. 흰색으로 동일시되며 액체에서 고체로, 기화한 것으 로부터 다시 환원된 것으로, 하늘에서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구름의 세계이지요. 지상은 이마에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세계이며 덩치가 크고 무거운 업이 뭉쳐졌다 흩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걸어갑니다. 구름족의 후 손으로써 머리칼이 허옇게 되도록 영문을 잘 모른 채 그곳을 걸어갑니다.
고통이 모두 보석으로 영그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보석은 사리를 상징하겠지요. 이슬 머금은 꽃들은 피고 지고, 우리는 땀과 눈물에 젖어 여기를, 지금을 지나갑니다. 매미울 음은 고통스런 삶의 어떤 절정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삶의 노래이며 종족의 번식을 위한 세레나데지요. 어쩌면 매미울음 으로 요약된 이 한 마디는 우리네 삶을 요약한 단 한 마디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옵니다. 기화한 물질로써의 구름이면서 동시에 물질을 빠져나간 영혼으로써의 구름이기도 할 그 가을 말입니다.
한 편의 시는 커다란 세계를 담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상징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지 요. 상징은 언어로 된 약속입니다. 한 마디의 말이 누군가 에게 가 닿을 때 그들은 하나의 약속을한 것과 같습니다. 말이란 서로에게 가수많은 결속을 만듭니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지요. 구름족들의 법칙입 니다.

▲ 시인 정학명(가람식물원)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