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국이 번역한 ‘부질없는 이야기’를 읽고

 

▲ 오원근 (법무법인 청주로)변호사

구추백(瞿秋白, 1899~1935)은 중국 공산당 초기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러시아어를 공부하게 된 것을 계기로, 21살 때 러시아로 가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23살에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초기 중국 공산당의 조직과 이론의 기초를 닦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28살에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32살에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원직에서 해임된 후, 노신(魯迅, 1881~1936)을 만나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하였다. 36살인 1935년 2월 국민당에 체포된 후 4개월도 되지 않은 6월 18일 사형집행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질없는 이야기’는 구추백이 감옥에 있으면서 처형을 받아들이고(국민당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음)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돌아보며 쓴 글이다. 중국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를 감당하였던 혁명가의 마지막 글 치고는 나약하게 보이는 글이다. 그러나 엄청 솔직하다. 이렇게 솔직한 글을 본적이 있는가 싶다. 책 뒤표지에 있는 서평에서, 전리군 북경대교수는 “구추백은 햄릿 기질을 가지고 있으나 돈키호테 배역을 맡았다”고 말한다.
 구추백은 ‘정치적 오해’로 인해 정치(혁명)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와 맞지 않는(아니 맞을 수 없는) 역할임을 모르고 뛰어들었다는 표현으로 읽힌다. 그는 이런 오해의 바탕으로 그에게 뿌리 깊게 박혀있는 ‘신사(紳士)의식’을 들고 있다. 그는 몰락한 사대부 집안에서 자랐는데, 어머니는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그런 가난에도 그는 “(월급을 못 주더라도) 여종을 거느렸고, 지금껏 직접 빨래를 하거나 밥을 짓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신사의식 때문에 그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자신의 내면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공산당에 가입한 후 십수년간 정치활동을 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의식과 신사 의식으로 이원화된 이중적 인격 때문에 항상 내부적으로 갈등하면서도 외부로는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 그를 바깥사람들은 훌륭한 혁명가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는 그런 평가를 두려워하며 말한다.


“나는 지금 감옥에서 열사인 체하면서 비분강개하며 죽을 수도 있지만, 감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역사는 속일 수도 없고 속여서도 안 된다. 나 한 사람을 속이면서 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혁명 동지들이 배신자를 열사로 오인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열사인 체하며 죽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이 책의 백미다. 이렇게 솔직하고 진실 되게 죽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책은 진실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나또한 내 안의 이중성을 아프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구추백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면서 그의 정치활동을 깎아내렸지만, 그는 현실 정치세계에서 비겁하게 물러난 적은 없다. 내적인 갈등을 감수하면서 그가 해야 할일을 다 하고자 하였다. 그가 말하는 신사의식 같은 것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는 제대로 잠도 못자고 끙끙 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그에게 신경쇠약을 가져오고 질병도 악화시켰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으며 그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솔직한 모습도, 그에 앞서 진실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일 게다.
  이 책을 번역한 조현국은 중문학 박사로서 아주 오래 전부터 구추백에 ‘집착’하며 여러 논문을 써왔다. 그는 왜 그렇게 구추백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조현국이 지금 두꺼비마을신문의 편집장을 하고 있는 것에서 찾고자 한다.
  그 또한 지식인으로서, 내부적으로 구추백과 비슷한 이중적 갈등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현국은 오래 전부터 두꺼비마을 생명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이런 갈등을 해소해 왔고, 그런 노력이 산남동에서 전국적으로 유례없는 도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냈다. 난 8년 전 그를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의 노력을 존경한다.
  조현국은 내게 그의 논문 〈구추백 문학사상 형성에 있어서 ‘보살행’의 영향〉을 주었고, 내가 2011년 〈검사 그만뒀습니다〉라는 책을 냈을 때는 분에 넘치는 독후감까지 써 주었다.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 그의 번역서에 대해 독후감을 썼으니, 그에 대한 ‘글빚’은 어느 정도 갚은 셈이 될까.

저작권자 © 두꺼비마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