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현존 시인 가운데 시를 가장 잘 쓰는 사람 다섯을 꼽으라고 하면 많은 사람의 손가락 안에 송찬호 시인이 있을 것입니다. 근자에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자유롭고도 아름다워서 그가 보여주는 세계를 읽는 일은 늘 떨리는 기쁨입니다. 그는 상황이나 사물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포장하여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그걸 펼쳐보면 의외의 경탄이 숨어 있는 선물 같지요. 오늘 읽은 시 ㅡ칸나ㅡ는 그의 그런 선물보따리 중 하나입니다.

 

칸나
  - 송찬호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언제나
발갛게 목이 부어 있는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낡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 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은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 숲이 휙휙 지나가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버렸소
삼류 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초로(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 지성사, 2009.


 시는 대상과 나 사이에 발생하는 떨림이나 울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제나 세계를 고요히 응시하며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 세웁니다. 그를 지나가는 시간 속의 사물들을 바라보며 사물들이 내는 표정과 눈빛을 마음으로 느끼는 거지요. 오늘 읽어드릴 시 칸나는 시인의 그러한 마음의 결을 잘 보여줍니다.
 이 시는 마당에 놓아 기르던 잘린 드럼통 속의 칸나에 관한 이야기지요. 칸나를 잘 관찰한 사람만이 칸나의 붉은 꽃봉오리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붉은 목을 연상할 수 있겠지요. 거기가 바로 이 시가 탄생되는 지점입니다. 붉은 목은 다시 푸른 잎사귀를 기타로 보게 하고 드럼통을 동전통으로 연상케 하며 짚시 가수의 누추한 삶을 연거푸 떠올리게 합니다. 상상은 시의 가장 중요한 무기죠. 상상이 있어 시는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상상은 서로 다른 것들의 비유이므로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연대케 하는 매력적인 화학작용이기도 합니다. 칸나는 시 안에서 이제 짚시 가수가 되었습니다. 드럼통 속에서 한 계절을 나고 시든 칸나의 이야기는 상상력과 만나 이제 아주 먼 어느 나라의 짚시의 생애와 동일시 되었습니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공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엔 어떤 진실이 있지요. 그것을 시적진실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엔 이런 상상을 일삼는 자들이 있고 그들이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는 아름다우며 처연합니다. 그 상상 속에는 삶의 이면적 진실이 숨어 있지요. 칸나 속에서 짚시를 꺼내어 보여주는 힘을 우리는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다만 놀랍고 아름다운 촉각의 소유자들. 우린 그들을 시인이라 부릅니다.

▲ 정학명 시인

 ※정학명 시인은 산남동 부영아파트 정문 맞은 편에서 화원(가람식물원)을 운영하고 있는 꽃집 사장님이기도 합니다. 10여년 전 시인이 원흥이방죽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회를 열었던 기억이 떠올라 화초 이야기를 청했더니 '행복한 시 읽기'로 응수 해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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