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송파구 세 모녀 사건에 이어 또 하나의 안타까운 소식이 증평에서 들려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생활고를 겪다가 앞날을 비관한 여성이 딸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한것이다.
 증평 모녀의 자살 사건은 독특한 성격을 갖고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다. 첫째, 여성과 어린 아이. 당사자가 모두 사회적 약자로 구분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 송파구 세모녀 사건의 여파가 강했던 만큼 일종의 코드가 되어 비슷한 맥락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셋째, 어린 딸 아이가 자살을 선택했을까? 넷째, 이 사건 또한 부족한 사회안전망, 이웃 주민의 무관심 속에서 일어난 일로 진단하고 있다. 현실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사건을 접하게 되면 남 일같지 않은 현실적인 상황에 사회는 안타까워 한다. 자살이나 고독사의 원인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 사는 이웃이 삶을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은 분명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시되는 해결책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현대 사회는 개인정보가 중시되고, 개인의 삶이 우선시되는 시민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이웃의 관심이라 함은 생사를 확인하기 위한 의도적인 방문도, 공동체 의식 아래 강제되는 모임의 형태도 아니다. 해당 가정의 상황에 염려돼 지속적으로 방문을 하고 대화를 시도하려 노력해도 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면 이웃의 관심이라는 말도 무색해 진다. 사회 안전망과 이웃의 관심은 시민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여러 대안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애초에 근본적인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이나 학대처럼 인권과 생명이 위협받는 문제가 생기면 소위 안전망을 책임지고 있는 기관에서의 일반적인 선택은 ‘전수조사’다. 과연 이런 전수조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까. 잠시 스쳐가는 사람이 각 가정의 이면에 존재하는 고통을 발견하기란 너무나 어렵고, 조사된 데이터는 이전과 유사한 결론을 도출한 채 담당자의 보고 서를 끝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필자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근본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 자체도 큰 행운이 따른 것이라 생각한다. 한 시민이 자살을 택하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일시적인 관심도 아니고, 몇 푼의 돈도 아니다. 생계를 위협받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는 개인적인 열망이 사회에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질적인 방법으로는 캠페인을 제안하고 싶다. 자택에서 타인의 손길을 거부한 채 고립돼 있는 사람들의 유일한 친구는 TV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업광고보다 인간적 소통을 유도하는 캠페인이 어떨까. 자살명소로 이름났던 서울 마포대교가 시민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조금이나마 위로를 전했던 것처럼 말이다. 초인종을 누르는 이웃이나 사회복지사 보다는 더 쉽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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