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희 산남부영사랑으로 회장 인터뷰

박완희. 그를 따라 다니는 이름은 참 많다. (사)두꺼비친구들 사무처장 ‧ 상임이사, 두꺼비협동조합 총괄이사, 로컬푸드 매장 ‘두꺼비살림’ 총괄이사. 게다가 2년 전부터 그는 산남부영사랑으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아파트 공동체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두꺼비 살리기’로 시작한 한 NGO활동가가 아파트 동대표를 맡게 된 사연, 아파트 동대표 회장을 맡아 어떤 변화를 추구했는지 궁금했다.

 
조현국 편집장(이하 편집장):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으로 취임한 후,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 결과 산남부영사랑으로 아파트가 최근 ‘지속가능한 도시만들기 2017 시민실천 콘테스트 최우수상’, ‘2107 초록마을 대상’ 등 큰 상을 받았다. 비결은 무엇인가?
박완희 입주자대표회장(이하 박완희): 2년전 아파트 대표회장이 되었다. 당시 입주자대표회의 구성 자체가 어려운 시기였다. 회장을 맡을 사람이 없다고 출마권유를 받았다. 평소 아파트 관리운영에 대한 고민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투명한 아파트 관리운영, 공동체 활성화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하였고, 새롭게 바뀐 관리소장님이 제안을 잘 받아주셨다. 동기부여를 위해 청주시에서 시행하는 초록마을만들기 사업 공모를 내보자고 제안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동대표님들의 협력, 주민들의 호응이 좋아서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다.
▲ 산남부영사랑으로 아파트 수상 모습.(초록마을 대상)
 
편집장 : 아파트 공동체를 위한 주민참여 설문조사, 주민참여 예산제 등 민주적인 운영 방식이 눈에 띤다. 어디에 주안점을 뒀고, 무엇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 생각하는가?
▲ 사랑으로 아파트 설문조사
박완희 :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주민들의 생각을 아파트 운영에 반영해보자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결정하면 되는 문제들인데 그래도 주민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한 결과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아파트 ‘밴드’를 만들고 예산편성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식조사 등을 스마트폰 구글 설문지를 만들어 돌려보았다. 주민들은 민주적인 아파트 운영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과반수 정도의 의사를 듣고 싶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약 16% 정도의 의견수렴이 되었다. 그래서 주민참여 예산제에서는 온라인 상의 참여자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스티커 투표를 하게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주민 스스로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적극성을 부여하기 위해 참여자들에게는 추첨을 통해 소정의 선물을 제공하는 이벤트도 많이 열었다. 아파트 관리운영을 대표회의나 관리소에 맡겼다는 대의제 방식에서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데는 주민들이나 대표회의, 관리소가 서로 경험이 부족해 보인다. 앞으로 더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편집장 : (사)두꺼비친구들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지난 10년 동안 산남동 마을공동체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박완희 : 2007년 초에 마을에 입주가 시작되었다. 두꺼비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과연 두꺼비와의 공존이 가능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전문가들이나 시민사회의 의견은 어렵다는 의견이었고, 그렇다고 상생의 협약이라는 것을 당시 개발주체인 토지공사와 원흥이생명평화회의 간에 체결을 했는데 포기하고 물러설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두꺼비 살리기 운동을 하자고 맘을 먹었다. 그래서 마을의 주민이 되었고, 주민들과 함께 초기 택지개발사업지구의 민원문제였던 횡단보도와 신호등 설치, 중앙선 분리 등을 주민 서명을 받아 해결해 나갔다. 이후 2008년에 산남 3지구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협의체인 ‘산남두꺼비마을아파트협의회’, 2009년에 창간된 두꺼비마을신문과 함께 해 왔다. 2010년에는 확장된 주민협의회가 발족되었는데 샛별초 인조잔디 사태로 좌초되기도 했다. 2014년에는 마을공동체 활동을 주민 스스로 자립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자고 해서 ‘두꺼비협동조합’이 만들어졌고, ‘두꺼비살림’ 로컬푸드 직매장 운영까지 하게 되었다. 2007년 이후 매년 두꺼비생명한마당이라는 축제를 주민들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해왔다. 현재는 아파트 작은도서관 운동이 활성화 되고, ‘산남오너즈’가 상가번영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면서 다시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되어가는 모습이다. 이제는 자발적인 공동체 운동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이어서 보기 좋다.
 
편집장 : NGO활동가로 투신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NGO활동가로서 눈물과 희망은 무엇인가?
▲ NGO활동가 강연에서 장래 ‘환경운동가’를 꿈꾸는 김민기 어린이와 함께. 박완희 회장은 충북 NGO활동가의 삶과 희망을 다룬 책, 『좋은 세상 설계자들』의 1인으로 선정되어 소개된 바 있다
박완희 : 보은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청주로 유학을 왔다. 당시 청주 아이들은 미리 학원을 다닌 친구들이 많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선행학습이었던 것이다. 농사짓고 있는 부모님께 학원 다닐 돈을 말씀드리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농민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해도 항상 어렵게 생활을 하는 것일까 의문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대학으로 이어지면서 사회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생회 활동을 더 열심히 하였다.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라고 해야 할까? 1995년도에는 충북대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졸업 후에도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회 정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중 선배들이 환경운동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아서 여러 고민 없이 NGO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 원흥이 두꺼비를 만나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박완희 사랑으로 아파트 회장은 지난 10여 년 동안 두꺼비마을 공동체 형성에 있어서 ‘산파’ 역할을 해 왔다. 산남 3지구 내 8개 아파트 입주자대표들을 모이게 했고, 이를 토대로 끊임없이 마을공동체 운동을 펼쳐왔던 것이다. 그가 해 왔던 과정을 지켜 본 한 사람으로서 그의 태도는 마치 ‘담쟁이’와도 같았다. 벽이 가로막으면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벽을 타고 넘어가는 담쟁이! 그는 지난 10여년 간 “바위에 계란치기와 같은 현실"을 담쟁이처럼 걸어 왔다. 하지만 지금 그 앞에 놓인 길도  실로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익명의 개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공동체 문화를 일구는 것, 자본이 주도하는 도시에서 도시공원을 지키는 것, 그리고 팽창을 추구하는 도시의 논리 속에서 청주의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것. 강고한 ‘현실의 벽’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그는 그 ‘벽’ 앞에서 어떻게 할까. 지난 세월 그래 왔던 것처럼 ‘담쟁이’가 되어 그 현실의 벽을 타고 넘지 않을까? 
 

▲ 아들 준서와 찍은 사진. 박완희 회장은 세 자녀를 두고 있다.막내 아들 준서는 산남동에 이사 온 후 얻은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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