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아파트 거실 창문으로 바로 앞 초등학교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운동장 한 귀퉁이에 가방을 던져놓고 정신없이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에 싱그러운 바람이 분다. 국민학교라 불렀던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나면 나 역시 또래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놀았다.

어느 날 학교 후문 앞 문방구에 아이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달려가 보니 누런 종이 상자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상자 안에는 노란 솜털이 보송한 병아리들이 눈도 못 뜨고 삐악삐악 목청껏 울어대고 있었다. 모처럼 의기투합한 우리 삼남매는 하얀 비닐봉지에 샛노란 병아리를 소중하게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눈에 제법 널찍했던 뒷마당에 병아리를 풀어놓고 깔깔거리며 쫓아다니고 어설픈 솜씨로 병아리 집도 만들어 주었다. 비록 며칠 못가서 죽은 병아리를 붙들고 엉엉 울어야 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읽게 된 권정생선생님의 《빼떼기》는 병아리를 처음 본 어린 시절 추억들을 소환한다. 《빼떼기》를 읽고 아이들, 부모님, 선생님이 함께 하는 독서 토론 모임이 열린다는 말에 경북 상주의 작은 중학교를 찾아갔다.

빼떼기는 순진이네 까만 병아리 이름이다. 엉거주춤 서서 빼딱빼딱 걷는 모양새 때문에 빼떼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처음부터 빼딱빼딱 걷던 것은 아니었다. 종종거리며 어미를 쫓다가 군불을 지펴놓은 아궁이 속에 뛰어드는 바람에 불에 데어 엉거주춤 서서 빼딱빼딱 걷기 시작했다.

“정말 누구나 빼떼기를 보면 가엾으면서도 장하게 느낄 것이다. 보기 흉하면서도 그 어려운 고통을 이기고 살아날 것이 누구에게나 대견스러웠다. 하기야 빼떼기 혼자 버려뒀더라면 벌써 죽어 버렸겠지만, 그러나 빼떼기를 보살펴 준 것만큼 제 스스로도 용감했다. 부리가 거의 없어진 주둥이로 모이를 주워 먹는 일을 보기에도 애처로울 만큼 힘이 들었다. 한 번 쪼면 다른 데로 튕겨 나가 버리고 또 한 번 쪼면 또 튕겨 나가고, 그래도 쪼아 먹고 살아난 것이다.” - 《빼떼기》 중에서

솜털이 거의 타버리고, 주둥이는 뭉그러진 빼떼기를 순진이네 식구들은 살뜰히 보살폈다. 순진이 엄마는 불에 그슬려 털이 없는 빼떼기가 추울까봐 옷까지 만들어 입혀준다. 덕분에 빼떼기는 여느 수탉처럼 볏도 돋았고 두 날개를 엉거주춤 치켜들고 목을 늘이면서 ‘꼬르륵’ 하고 울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울음소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대견한 소리였다. 서툴지만 빼떼기는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피난을 가게 된 순진이네 가족은 마음 아프지만 빼떼기를 잡아먹기로 한다.

상처받고 부족한 모습으로 빼딱빼딱 걷는 것이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모습일지도 모를 빼떼기 이야기를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읽고 독서 토론을 진행했다. 같은 책을 읽고 여러 세대가 나누는 이야기들이 참 다양하고 놀랍도록 진지했다.

빼떼기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을 보고 전쟁의 참담함을 알게 되었다는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의 속 깊은 배움이 대견했다. 아픈 빼떼기를 보살핀 순진이네 가족처럼 주변의 아이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따뜻하고 든든했다. ‘빼떼기가 정말 바라는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우리는 빼떼기의 행복을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나에게도 질문이 되었다.

한 아이의 이야기를,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누군가에게는 전쟁의 아픔을 알려주고, 누군가에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주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밖에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집의 가족들 생각이 나는 것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면 우리 학교 아이들이 떠오른다. 아이들과 부모님들과 꼭 해봐야지 다짐하며 소중한 장면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으로 마음으로 꼭꼭 담아두었다.

▲ 추주연(경덕중)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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