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수업으로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고 오후가 되자 목이 뻐근해져 온다. 결국 마지막 수업 시간엔 갈라진 목소리 때문에 아이들 보기가 영 민망하다. 목소리가 이래서 미안하다는 나에게 아이들은 “선생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에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준다.

한 달 가까이 계속되는 감기 몸살에 기관지염이 겹쳐 몸이 천근만근이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 어깨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데 지훈이가 다가와 머뭇거리더니 점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넨다. 팩에 담긴 복분자 액기스다.

엉겁결에 받아들고는 ‘이게 뭐야?’ 라고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지훈이는 귀엣말 하듯 작은 목소리로 목이 아플 때 먹어봤는데 좋아서 가져왔다며 총총 교실로 돌아간다.

지훈이 주머니 안에서 하루 종일 있어서인지 팩이 뜨뜻하다. 내 마음도 뜨뜻하게 덥혀진다. 며칠 후면 시행될 김영란법이 떠올라 그 마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깝다.

문득 첫 발령지 작은 시골 학교에서 첫 담임을 하던 해, 우리 반 성규가 떠오른다. 할머니랑 아버지, 삼촌과 생활하던 녀석은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 앉아 키우는 개가 새끼를 몇 마리 낳았는지, 전날 밤 할머니랑 삼촌이랑 싸운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내게 해주었다.

그 해 딱 이맘때였나 보다. 집집마다 김장을 하던 초겨울 어느 날 성규는 등교하자마자 교무실로 쫓아와 내 책상 위에 검정색 비닐봉투 꾸러미를 올려놓았다. 헐겁게 묶은 봉투 사이로 뜨거운 김이 올라와 검은 비닐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며칠 전 김장을 도와야 한다고 투덜대던 성규였으니 아마 새 김치에게 자리를 내준 신 김치로 할머니께서 솜씨를 발휘하셨던 것이리라. 어찌나 큼지막하게 부쳐 보내셨는지 김치전 두어 장으로 선생님들 여럿이 함께 배가 부르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치전의 추억에 잠겨있는 나를 옆 반 녀석들이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선생님, 며칠 후에 우리 담임샘 생신이신데요, 카드랑 집에 있는 재료로 우리가 케익 직접 만들어 드리는 건 괜찮죠? 그건 김영란법에 안 걸리죠?” 하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한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빛이 애원하듯 반짝거린다.

검정 비닐 봉투 속의 김치전도, 지훈이의 복분자 액기스도 이제 추억 속으로 떠나보내려 한다. 지훈이의 복분자 액기스를 차마 먹지 못하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쳐다보고 그냥 만지작거렸을 뿐인데 목이 한결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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