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선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후궁 공빈 김씨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평양으로 피난해 있다가 그곳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함경도 강원도 전라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나랏일을 돌보았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으는 등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1606년에 인목 왕후가 동생인 영창 대군을 낳자 일부 신하들이 영창 대군을 세자로 삼자고 주장하여 광해군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위태롭게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바로 영창 대군을 세자로 삼자고 했던 유영경 등을 이때 처형시켰다. 그 뒤에는 당파를 떠나 인재를 고루 뽑아 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국가 재정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성곽과 무기를 정비하고, 각종 책을 펴내는 등 전쟁 뒤에 어려워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1616년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명나라를 침략하자, 명나라를 도우면서 후금에게도 원한을 사지 않도록 지혜롭게 중립 외교를 펼쳤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하의 꼬임에 빠져 폭정을 펼치면서 영창 대군을 죽이고 그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1623년 김류, 이귀 등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641년 (인조)19년)에 죽었다.

▲ 남양주 광해군묘(南楊州 光海君墓)는 사적 제36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번지이다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폈다. 조선은 명이나 후금 어느 쪽과도 전쟁을 하지 않았다. 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전쟁은 마땅히 피해야 할 일이라고 광해군은 생각했다.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고 후금과도 적이 되지 않게 하여,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꾀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당시의 조선에게 꼭 알맞은 것이었다. 중립외교는 왜란 때 얻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광해군이 왕으로 있는 동안, 조선은 명나라나 후금 어느 쪽과도 전쟁을 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조선은 명나라와 친하고 후금을 적으로 대하는 것으로 외교정책을 바꿨다. 그는 뛰어난 외교 정책을 펼쳤으나 인조반란으로 쫓겨난 (광해군) 비운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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